전염병이 휩쓴 세계사_김서형
전염병이 휩쓴 세계사_김서형(전염병은 어떻게 세계사의 운명을 뒤바꿔놓았는가
존 스노, 공동펌프와 콜레라 풍자화
<머리말>
약20만 년 전, 오늘날 인류의 공통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서 처음 출현해 전 세계로 이동했다.
<제1장 아프로-유라시아 네트워크와 전염병 01인류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
빙하시대는 비교적 더 추운 빙하기와 덜 추운 간빙기로 나룰 수 있는데, 45억 년 전 지구가 탄생한 이후 여러 차례의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해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약 7억 5,000만년 전은 가장 극심한 빙하기로, 오늘날 적도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빙하고 뒤덮였다. 지난 100만 년 동안 지구에는 총 일곱 차례의 빙하기가 찾아왔다. 아직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과학자들은 지구 공전주기나 자전축의 변화 등으로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고 추정한다. 마지막 빙하기는 약 11만년 전부터 시작해 10만 년 정도 지속되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던 약 1만 년 전 지구의 기온이 점차 올라가 극지방의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
인간이나 동물과 함께 살면서 영양분을 뺏는 벌레를 과학자들은 ‘기생충’이라고 부른다. 기생충은 인간과 동물에게 모두 전염병을 옮긴다.
<제1장 아프로-유라시아 네트워크와 전염병 02 실크로드와 천연두>
진시황(재위: 기원전246~210)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여러 나라로 분열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 제국의 황제다. 그런데 이 진시황조차 두려워 벌벌 떠는 적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몽골고원과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면서 최초의 유목 국가를 세웠다. 수렵과 방목 생활을 하던 흉노는 겨울동안 필요한 식량을 준비하기 위해 중국의 변방 지역을 자주 침량했다. ‘오랑캐가 중국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굳게 믿은 진시황은 그 오랑캐를 흉노라고 생각했고,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증축했다.
기원전 141년에 한 제국에서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 황제 무제(재위: 기원전 141~87)가 즉위했다. 훗날 역사가들은 무제를 위대한 황제로 묘사했다. 그의 탁월한 대외 정책 때문이다. 무제의 대외 정책은 진시황조차 두려워했던 흉노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었다. 뛰어난 장군 선발과 지속적인 군사 훈련을 통해 전쟁을 준비한 무제는 기원전 129년에 흉노를 공격했다. 그 결과, 흉노는 한 나라 변방에서 멀리 떨어진 고비사막으로 이동했다. 그렇다고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월지(우즈베키스탄)에 장건을 사신으로 파견해 동맹을 맺고자 함. 기원전 139년.
무제 시대의 역사가인 사마천이 기로한 [사기]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19세기 후반에 중국의 여러 지역을 답사한 다음 [중국]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책1권에서 그는 중앙아시아를 흐르는 두 강인 시르강과 아무르 강 사이에 위치한 트란스옥시아나(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의 남서부 지역에 해당함)와 인도에 수출되는 중요한 상품이 중국의 비단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는 ‘자이덴슈트라센’, 영어로는 ‘실크로드’라고 불렀다. 이후 많은 역사학자가 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 그리고 로마제국까지 연결한 교역로를 실크로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중국 동부에 있는 산시성의 시안은 오랫동안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시안은 ‘서쪽의 수도’를 의미하기 때문에 ‘서안’이나 ‘서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고, 이후에는 ‘장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618년 당의 건국 이후 수도가 되었으며, 그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을 장안이라 불렀다. 바로 이곳 시안이 실크로드가 처음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시안의 비단이나 항저우의 면직물, 광저우의 도자기와 차 등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 북부와 사우디아라비아 북부, 그리고 콘스탄티노플까지 이동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의 말과 옥, 서남아시아의 유리 등이 중국으로 이동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유리를 가장 먼저 사용한 지역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였다. 유리는 규소와 탄산칼슘, 탄산나트륨 등을 고온에서 녹인 뒤 급속히 냉각시켜 만들었는데, 모양이나 색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유리에 관한 기록은 로마 정치가 플리니우스가 저술한 [박물지]에 최초로 등장한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상인이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솥을 받쳐놓을 돌을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자 가지고 있던 소다 덩어리 위에 솥을 올렸다. 그러자 가열된 소다 덩어리와 강가의 모래가 결합돼 유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럽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로마제국은 이탈리아반도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로마는 원래 왕이 지배하는 왕정이었다가 정치권력을 분배하는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로마의 공화정은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균등하게 통치할 수 있도록 견제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더 많은 정치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내전이 발생하면서 ‘아우구스투스’로 잘 알려진 옥타비아누스(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가 권력을 잡았다. 이때부터 황제가 지배하는 제정이 시작되었다. ‘로마제국’이라는 명칭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기원전 1세기 말 제국이 수립되면서 약 200년 동안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일명 ‘오현제’)가 지배하는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졌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로마의 평화’라고 부른다.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직계 자손이 아닌 현명한 사람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종두법을 발명한 이후 점차 감소했고, 1979년에 세계보건기구는 천연두를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진 전염병으로 선언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 사람들은 더 많은 생산물을 얻기 위해 소를 길들이기 시작했는데, 천연두는 소와 인간에게 공통으로 발생했다.
<제1장 아프로-유라시아 네트워크와 전염병 03 바닷길과 페스트>
바닷길은 이집트 북부에 있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홍해와 아라비아해를 거쳐 인도와 말라카해협을 지나 중국 광저우에 이르는 해로를 말한다.
향신료는 음식에 맛과 향을 더하는 일종의 조미료다. 우리나라에서는 향신료로 마늘이나 고추, 파, 생강 등을 주로 사용한다.
기원전 1세기 무렵 그리스 항해사 히팔루스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여름과 겨울에 방향이 바뀌는 ‘계절풍’은 대륙과 해양의 온도 차이로 발생한다. ‘히팔루스 계절풍’ 여름에는 고기압인 바다에서 저기압인 육지로 바람이 불고, 반대로 겨울에는 고기압인 육지에서 저기압인 바다로 바람이 분다.
기원전 1세기 말에 설립된 로마제국에는 여러 변화가 나타났는데, 이 가운데 종교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원래 다신교를 믿는 로마제국에서는 기독교를 금지했다. 하지만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기독교는 급속하게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오늘날 이스탄불 지역에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세우고 로마제국의 통합을 강조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1,000년 이상 유럽의 경제와 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역사의 중심이 점차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하면서 395년 로마는 두 개의 제국, 즉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으로 분리되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용한 게르만 용병 집단에 의해 오히려 멸망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로마제국이 세워진 이후에 여러 차례 공동 황제가 즉위했는데, 동로마제국의 전성기에도 마찬가지였다. 518년 당시 기준으로 매우 고령인 68세에 황제가 된 유스티누스 1세(재위:518~527)는 자신의 조카를 내무대신으로 임명하고 정치를 맡겼다. 527년에 두 사람은 공동 황제가 되었고, 같은 해 유스티아누스 1가 사망하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527~565)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가 통치하는 동로마제국은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페스트균에 의해 감염되는 페스트는 야생에 사는 다람쥐나 들쥐에서 나타나는 전염병이다. 그리고 집쥐나 곰쥐가 인간에게 페스트균을 옮긴다. 곰쥐는 원래 인도와 파키스탄 지역에 살던 종인데, 바닷길을 항해하는 배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로마제국으로 곡물과 상아를 운반하던 펠루시움에도 곰쥐가 많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동로마제국에서 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수가 약 2,50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541년에 동로마제국에서 처음 발생한 페스트, 인구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침)
<제1장 아프로-유라시아 네트워크와 전염병 04 몽골제국의 등장과 유럽의 흑사병>
14세기 동안에 아프로-유라시아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은 흑사병이었다. 흔히 ‘페스트’라고 부르는 흑사병은 원래 중국 남서부 지역의 윈난성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던 풍토병이었다. 쥐를 숙주 동물로 삼아 기생하는 벼룩이 사람에게 흑사병을 옮기는데, 발열과 통증, 림프샘 부종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몽골제국의 통치 기간에 처음 흑사병이 발생한 곳은 황허 유역의 허베이성이었다. 1331년에 처음 발생한 흑사병으로 당시 도시 인구의 90퍼센트가 사망했다. 치명적인 전염병을 통제하기 위해 허베이성에서는 삼나무 가지를 불태운 다음 그 연기로 도시를 소독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1346년 몽골 군대는 제노바공화국의 카파를 포위했다. 몽공군대 흑사병 발생, 퇴각, 그런데 퇴각하기 전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투석기를 이용해 카파 성안으로 던졌다. 포위된 채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도시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확산되기에 매우 적합한 조건이었다.
카파를 기점으로 유럽으로 번진 흑사병은 1340년대 말에 절정에 달했다. 어느 지역에서 시작되었는지, 전염병의 발생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치료법이 효과적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유럽인들 사이에서 흑사병은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떤 사람은 신이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주는 벌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결과 ‘채찍질 고행’이 유럽인들 사이에서 만연했다. 채찍질 고행은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앞에서 채찍질을 통해 인간의 죄를 고백하고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한 일종의 집회였다. 하지만 살점이 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는 채찍질 고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기대처럼 흑사병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흑사병을 ‘신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한 일부 사람들은 정염병 발생의 원인으로 유대인을 지목하기도 했다. 유대인에 대한 방화와 살인 급증. 당시 화형을 당한 유대인들은 약 2,000명 이상
흑사병이 만연한 기간에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선박을 40일 동안 항구 밖에 격리한 것으로부터 검역이 유래한다. 향이 강한 허브를 태워 선박에 탑승한 사람이나 상품을 소독. 별다른 효과는 없음. 1990년 국내에 개봉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는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좋은 대학이나 직장을 가기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한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을 강조한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사실 ‘카르페 디엠’은 1340년대 흑사병이 만연한 유럽에서 유래된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람들이 죽어 나가던 상황 속에서 남겨진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자는 뜻으로 서로에게 해주는 인사말이었다.
흑사병으로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 혹은 2억명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음.
새부리 가면을 쓴 의사
유럽 여기저기서 거리에는 시신들이 가득 쌓였는데, 그 사이로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새 부리처럼 길게 튀어나온 가면을 쓰고 긴 가운을 입었다. 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 채 긴 막대기로 시신들을 뒤집어 보는 이들은 바로 의사였다. 마스크에는 향신료나 식초를 묻힌 헝겊을 넣었고, 눈 부분에는 유리를 넣었다. 이 의사는 ‘닥터 쉬나벨’이라고 불린다.
<제2장 아메리카 네트워크의 결합과 전염병 01유럽인의 아메리카 이주와 천연두>
미국에서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은 ‘콜럼버스 데이’로 지정되어 있다. 1492년 10월 12일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을 기념했기 때문이다. But, 원주민에게는 파멸과 멸종의 날이나 다름없다.
15세기말 유럽인이 아메리카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아메리카에는 약 3,000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 가운데는 인구 5~600만 명 정도 되는 잉카제국과 아즈텍제국도 존재했다.
특히 석조 건축 기술이 매우 발달했다. 오늘날 페루 중남부 안데스산맥에 남아 있는 맞추픽추는 잉카제국의 대표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주장은 잉카제국이나 아즈텍제국과 같은 막대한 부와 기술, 권력을 가진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게다가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도 아니었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은 바이킹이었다. 바이킹은 오늘날 노르웨이나 스웨덴이 위치한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살다가 인구문제와 식량문제로 9세기 말부터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3년쯤 지나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인 스크랠링 부족에게 쫓겨남. 이후 1492년에 콜럼버스가 이주할 때까지 아메리카에는 유럽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오늘날 스페인 남서부에 있는 ‘팔로 데 라 프론테라’를 출발했다. 10월 12일 새벽 2시에 드디어 육지를 발견했고, 스페인 국기를 꽂은 다음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의 ‘산살바도르’라고 불렀따. 오늘날 쿠바 동북쪽 카리브해에 있는 바하마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콜럼버스가 만난 사람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아라와크족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도라고 생각한 콜럼버스는 이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가리키는 인디언이라는 말은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명칭이다.
그 탐험가가 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다. ‘아메리고’라는 이름에서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따는 설도 있다.
당시 아즈텍제국을 지배한 몬테수마 2세(재위:1504~1520)-코르테스, 스페인 병사 500명, 테노치티틀란, 황제는 스페인 병사들의 지나친 요구에 분노한 수천 명의 아즈텍 백성들에게 해산을 요구하다 돌에 맞아 죽음. / 전체 인구의 4분의 3이 천연두와 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결국 스페인은 근대식 무기나 군대가 아닌 ‘전염병으로 아즈텍제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1532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스페인 탐험가 바스코 발보아는 1513년 파나마해협을 횡단하면서 유럽인 최초로 태평양을 발견했다. 이후 포르투갈 선장인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항해하면서 이 바다에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발보아는 황금의 땅을 찾기 위해 200여 명의 스페인 병사와 약 800명의 원주민을 데리고 원정을 떠났다. 발보아 원정에 참여한 스페인 병사 피사로는 파나마의 관리가 되었는데, 어느 날 잉카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 1532년 피사로는 평화 교섭을 가장한 채 잉카제국의 황제인 아타우알파(재위:1525~1533)를 만나게 되었다. 이미 천연두 기승.
<제2장 아메리카 네트워크의 결합과 전염병 02콜럼버스의 교환과 매독>
18세기 말 프랑스 루이 16세(재위:1774~1792)의 왕비 마리앙투아네트가 화려한 감자 꽃을 연회 장식으로 사용한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왕실과 귀족에게 감자가 널리 알려졌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를 식량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감자는 아일랜드 역사에 끔찍한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역사학자들은 마지막 빙하기 이후 가장 추운 시기인 13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를 ’소빙하기‘라고 부른다. 1739년에 러시아 북동부에 있는 캄차카반도의 화산이 폭발하면서 1740년은 기후 변화가 더욱 심각했다. 1739년 12우얼부터 강풍이 불면서 혹한이 시작되었고, 1740년 2월에는 무려 7주 동안 서리가 내렸다. 기후변화는 작물 재배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일랜드에서는 작년에 수확한 감자는 얼거나 썩어서 먹을 수 없었다. 유럽의 다른 국가보다 감자 의존도가 높은 아일랜드에서는 식량 가격이 폭등했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당시 기근으로 사망한 인구수만 수십만 명에 달했다. 아일랜드 역사에서 1740년은 이른바 ’학살의 해‘였다.
유럽에서 매독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494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 때였다. 당시 프랑스의 샤를 8세(재위:1483~1498)의 군대는 이탈리아로 이동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고, 그 결과 많은 병사가 매독에 걸렸다. 매독의 초기 증상으로 피부 일부가 짓무르는 궤양이 나타난다. 매독이 계속 진행되면 발진과 발열, 장기 손상이 일어난다.
<제2장 아메리카 네트워크의 결합과 전염병 03아프리카 노예무역과 황열병>
포르투갈은 이미 1444년부터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생활필수품과의 교환 방식이었으나 아메리카에 노예 노동력의 수요가 급증하지 노예 사냥꾼을 고용. 노예 사냥꾼에게 술이나 총을 주면 더 싼 가격으로 더 많은 아프리카 원주민을 잡아오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동족에 의한 매매 활동으로도 볼 수 있다.
(300년 간 1,500만 명)18세기 말까지 약 7,500만명의 아프리카 원주민이 노예선에 탑승했고, 이 가운데 1,200만 명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쇠사슬에 묶여 어두운 선실 안에서 음식을 먹고 잠을 잤다. 주식은 가격도 싸고 열량도 높은 땅콩, 그러나 불포화지방산이 많아 많이 먹으면 설사 유발, 선실의 위생상태는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대서양 삼각무역‘ 아프리카는 유럽으로부터 직물, 술, 무기 등을 사고 노예를 팔았다. 아메리카로 건너간 아프리카의 노예는 농장과 광산에 노동력을 제공했고, 거기서 생산된 설탕, 커피, 담배, 은 등을 유럽에 팔았다. 유럽은 아메리카에서 넘어온 원료를 가지고 제품을 만들어서 다시 아프리카로 수출했다.
노예로 잡히거나 팔린 아프리카 원주민과 함꼐 아메리카로 이동한 전염병은 황열병이었다. 황열병은 이집트 숲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아프리카의 오랜 풍토병이었다. 다른 전염병과 달리 증상을 통해 쉽게 구별할 수 있는데, 눈이나 피부가 노랗게 변하고 피부에 보라색 반점이 생긴다.
사탕수수 재배는 다른 작물과 다르게 물이 많이 필요하다. 밀이나 보리, 옥수수 등과 비교하면 15배 이상 많은 물이 필요하다. 사탕수수를 끓여서 졸인 다음 설탕으로 정제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도 물이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은 물이 풍부하고 목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 주로 발달했다. 카리브제도는 연 강수량이 2,000밀리미터 이상이며 숲이 울창한 열대 지역이어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매우 알맞은 조건이었다.
1793년 필라델피아에서 황열병이 발생했다. 18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발생한 전염병 가운데 가장 치명적이었다. 3개월 동안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정도가 황열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필라델피아 인구 약 5만 명 중에 2만 명 정도가 전염병을 피해 도시를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
15세 말 콜럼버스를 비롯한 유럽인이 건너가면서 그들과 함께 아프로-유라시아의 다양한 전염병도 함께 건너갔다. 그 결과,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아프로-유라시아로부터 이동한 전염벼응로 사망했다.
<제3장 산업 네트워크의 확대와 전염병 01도시화와 콜레라, 그리고 위생 개혁운동>
18세기 중반 영국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이 발생한 지역이다. 소빙기 동안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목재 수요량이 급증했다. 하지만 목재 생산량이 수요량보다 적어 사람들은 새로운 연료를 찾아야 했는데, 이때 석탄이 관심을 끌게 되었다.
처음에는 땅 위에 드러난 석탄을 사용하다가 석탄 소비량이 증가하면서 땅속에 묻힌 석탄을 채굴했다. 하지만 땅속의 석탄을 채굴하다 보니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땅속을 흐르는 지하수 때문에 석탄을 제대로 채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발명가인 토머스 뉴커먼은 대기압을 이용해 물을 끌어올리는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하지만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졌다. 수증기를 냉각시킬 때 실린더에 냉수를 넣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때 실린더를 다시 가열시키려면 또 석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와트는 응축기를 따로 만들어 실린더 안에 있는 수증기를 관을 통해 밖으로 내보낸 뒤 실린더 외부에서 냉각시키는 장치를 발명했다. 이후 와트의 증기기관은 석탄 채굴뿐만 아니라 방직공장, 제분소, 제철소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9세기 초에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 중, 경제상황이 좋지 않음.
1811년 잉글랜드 중북부의 노팅엄에서 기계파괴운동이 처음으로 발생함.
네드 러드라는 사람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고 해서, 기계 파괴 운동을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러드는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말함.
상당수 사람들이 교수형에 처해짐.
당시 영국 상원의원이자 시인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의회에서 노동자를 위해 연설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영국 사회에 기계가 얼마나 만연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1871년 벵골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인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확산되어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1832년에 발생한 콜레라 때문에 런던에서는 2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런던 인구는 약 65만 명 정도였다.
1832년 런던에서 콜레라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1838년에 다시 발생했다. 당시 사망자 수는 약 1만 명이었다. 1849년에 발생한 콜레라 때문에 5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콜레라에 치명적이었다.
1854년. 영국의 의사 존 스노는 콜레라의 원인이 오염된 공기가 아닌 오염된 물이라 생각해 런던에 설치된 공동 펌프를 제거했다. 그 결과 콜레라 환자의 수가 급감했다.
사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공중 보건법이 제정된 국가다. 1848년에 콜레라가 널리 확산되면서 국가가 위생과 보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제3장 산업 네트워크의 확대와 전염병 02결핵이 드러낸 사회문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전염병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1893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2012년 세계 2대 경매 회사 가운데 하나인 소더비 경매 회사가 주최한 행사에서 사상 최고가인 1억 1,99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350억 원에 거래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뭉크의 ’병든아이‘ 친누나인 소피에가 병에 걸린 모습을 그린 작품. 실제로 어머니와 누나가 모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폐결핵은 폐에 결핵균이 들어가 염증을 일으키면서 발생하는 질병이다. 기침과 가래가 대표적인 증상이고,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한다. 체중 감소와 피로감, 발열도 함께 나타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전염병은 결핵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7000년 무렵 수렵 채집 시대의 화석에서 결핵의 흔적이 발견되고, 기원전 2400년 무렵 이집트의 미라에서도 흔적을 볼 수 있다. 결핵의 원인인 결핵균이 처음으로 발견된 시기는 1882년으로 비교적 최근이다. 독일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 현미경으로 탄저균 배양, 이후 결핵균도 성공적으로 분리.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3월 24일은 ’세계 결핵의 날‘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항생물질 요법 등과 같은 결핵 치료법은 1940년대 이후에나 개발되었다.
14세기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감소시킨 페스트는 환자가 온몸이 검게 변하면서 사망했기 때문에 ’흑사병‘이라고 불린다. 반면, 결핵에 걸린 사람은 창백해지면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 ’백색 페스트‘라고 불린다.
이상(’날개‘)은 천재인 동시에 광인이라 불리며 우리나라 모더니즘 문학을 개척한 선구적인 작가다. 하지만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데, 사망원인이 바로 폐결핵이었다고 한다.
2015년 세계보건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매년 1,000만 명 정도의 결핵 환자가 발생하고, 이 가운데 200만 명 이상이 사망한다. 전 세계적으로 결핵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에이즈나 말라리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결핵 환자들 가운데 85퍼센트 이상이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회원국의 경제 발전을 모색하고 세계 경제 문제에 함께 대처하기 위해 설립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총 35개 국가가 가입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OECD 국가 가운데 결핵 발생률이 가장 높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결핵 환자는 3만 3,000명 정도이며, 결핵 발생률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무려 일곱 배 이상 높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병인 결핵은 21세기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핵은 산업혁명 이후 산업 네트워크의 형성과 확산 속에서 장시간의 노동과 불균형한 식사로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결핵은 빈부 격차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전염병이다.
<제3장 산업 네트워크의 확대와 전염병 03대기근과 장티푸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시간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염병‘이라는 단어가 총 736회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비속어로 사용되는 단어인 ’염병‘은 전염병을 줄인 말이기도 하지만 주로 장티푸스를 가리킨다.
[동의보감]은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완성되고 1613년에 간행된 조선 최고의 의학 서적이다. 허준.
1670년부터 1671년까지 대기근이 덮쳤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가장 추운 소빙기였고,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기후변화가 발생했는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신 대기근으로 30~40만 명이 희생되었다. 굶주림보다 전염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유행한 전염병으로는 천연두와 장티푸스, 이질 등이 있다. 특히 장티푸스는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제4장 전쟁과 전염병 01미국내전과 세균성이질>
메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저자 비처 스토를 만났을 때 ’거대한 전쟁을 일으킨 작은 여인‘이라고 말했다.
미국내전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 연방이 북부와 남부로 분열되어 발생한 전쟁이다. 많은 사람이 미국내전의 원인으로 흑인 노예제도를 거론하지만, 사실 전쟁의 진짜 원인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미국 사회의 지역 갈등이었다.
19세기 초 미국은 동북부에서 점차 서쪽으로 영토를 개척해나갔다. 1803년에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구입했고, 1819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사들였다.
북위 36도 30분을 기준으로 북쪽은 자유주, 남쪽은 노예주가 성립한다고 결정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미주리 타협‘ 또는 ’1820년의 타협‘이라고 부른다.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 선언문으로 미국의 모든 노예가 해방된 것은 아니다. 선언문의 내용은 1863년 1월 1일 당시 북부에 저항하는 남부 지역의 노예를 해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문‘에는 북부의 노예나 연방을 탈퇴하지 않은 남부의 노예가 포함되지 않았다. 더욱이 북부에 저항하는 남부 지역은 남부연합을 형성해 연방으로부터 탈퇴했기 때문에 이 선언문이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 링컨의 노예 해방령은 미국내전 동안 단 한 명의 노예도 해방시키지 못했따. 그러나 186년 1우얼 연방 의회는 미국 전역에 걸쳐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미국내전이 끝난 1865년에 각 주의 비준을 받아 헌법 수정 조항 제13조가 되었다.
미국내전 동안 사망자 수는 약 62만 명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전쟁이었다. 전투로 사망한 사람은 3분의 1, 나머지는 전염병 특히 세균성이질로 사망
미국내전 당시 조지아주 앤더스빌에 가장 큰 포로수용소에 북군 병사들 수용, 매우 비위생적인 환경, 수용가능 인원 1만 명, 실제 인원 5만 명, 급기야 병사들 탈출, 남군은 울타리를 치고 이를 넘는 사람은 사살, 이 울타리를 죽음의 선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마감 시한을 의미하는 ’데드라인‘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제4장 전쟁과 전염병 02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인플루엔자‘>
보스나이의 수도인 사라예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 오스트리아가 사라예보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시간, 사실 원인은 훨씬 복잡, 이른바 ’유럽의 화약고‘라 불린 발칸반도의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
1914~1918년 11월 11일 독일 항복으로 끝남.
미국은 1917년 4월 6일 참전하기로 하나, 1918년 5월에야 서부전선에 병력을 보냄.
독일 작가 에리히 레마르크 [서부전선 이상 없다]
’1918년 인플루엔자‘로 미국에서 사망한 사람은 약 67만 명이었고,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14세기 흑사병으로 4년 동안 약 7,500만 명이 사망한 것과 비교하면 훨씬 치명적이다.
<제4장 전쟁과 전염병 03현대전쟁과 셀 쇼크>
제1차세계대전이 이미 산업화를 경험한 국가들과 이제 산업화를 시작한 국가들 사이에 식민지를 둘러싸고 발생한 전쟁이었다면, 제2차세계대전은 식민지 확보를 토대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가 결합하면서 발생한 전쟁이었다.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 제2차세계대전 시작. 미국이 투입한 전쟁 자본은 무려 3조 2,000억 달러였다. 인류 역사상 전쟁에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나라가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이었다.
가장 중요한 전투는 1944년 6월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우어 장군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파리를 해방한 노르망디전투였다.
1945년 8월 5일, 일본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라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사망한 사람들은 약 5,000만 명이었는데, 전체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구소련 출신이었다.
<제5장 현대사회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전염병의 진화 01아프리카의 식민화와 말라리아>
영국 소설가인 서머셋 몸의 대표적 소설 [달과 6펜스] 소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캐릭터는 타히티섬에서 생활한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2억 5,000만 명 이상의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하고, 이 가운데 200만 명 이상이 사망한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 사망할 확률이 10퍼센트 이상으로 매우 치명적이다. 말라리아는 얼룩날개모기류 암컷에 의해 전파되는데, 주로 두통과 구토, 발열 등의 증상을 보인다. 열대열말라리아는 쇼크, 의식장애, 혼수, 섬망(과다 행동이나 환각)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말라리아는 오랫동안 ’학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람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질병이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학질은 조선 시대에 자주 발생하는 전염병이었다.
17세기 동안 기나나무 껍질은 말그대로 말라리아의 특효약이었다. 기나나무는 남아메리카의 볼리비아와 에콰도르가 원산지다. 400가지 이상의 다양한 종이 자라는데, 오래전부터 잉카제국에서는 해열제와 강장제로 사용되었다. 기나나무 껍질에 – 질소를 함유한 화합물인 알칼로이드가 15퍼센트 정도 함유 – 알칼로이드의 20~40퍼센트가 키니네라는 성분 – 알코올에 잘 녹음 – 청나라의 강희제도 기나나무 껍질을 와인에 녹여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음 – 1820년 프랑스의 의사 조제프 펠레티에와 조제프 카방투는 알칼로이드에서 키니네를 분리하는 데 성공 – 이후 키니네는 말라리아 특효약으로 전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 덕분에 치명적인 풍토병이 두려우어 아프리카로 진출하지 못한 유럽이 마음대로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음.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가나는 유럽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국가였다. 당시 가나는 113년 동안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른바 ’아프리카의 해’인 1960년에 32개의 국가가 유럽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다.
<제5장 현대사회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전염병의 진화 02 글로벌 사회와 에이즈>
에이즈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의해 발생한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우리 몸에 있는 면역 세포가 파괴되어 면역력이 떨어지고 감염성 질환과 종양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태를 바로 ‘에이즈’라고 부른다. 중앙아프리카에 사는 녹색 원숭이로부터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2000년부터 2015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에이즈 환자는 450퍼센트 이상 증가했고, 현재 1,000명 이상의 에이즈 환자가 존재한다.
마치 15세기 초 유럽인들과 함께 이동한 천연두가 아무런 면역력이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 급속하게 퍼지면서 한 세기 안에 원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멸종한 것과 마찬가지다.
에볼라바이러스는 급성 열성 감염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로 갑자기 근육통이나 두통이 발생했다가 전신 출혈이 나타난다. 사망률 70퍼센트. 과학자들은 과일박쥐가 에볼라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매개체라고 생각한다. 과일박쥐는 아프리카 남부나 동남아시아, 인도 등에 사는 ‘날여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에볼라가 발생한 서아프리카에서는 원래 과일박쥐가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다. 생으로 먹는 전통. 가난한 나라라서 백신 개발에 관심을 두는 제약회사가 없음.
2002년 11월 중국에서 처음 발생한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에볼라와 마찬가지로 박쥐일 수도 있고, 사향고양이(과일을 먹음)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음.
16세기 명나라 때 편찬된 의학 서적 [본초강목]
조류인플루엔자는 조류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닭이나 오리, 야생 조류 등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전염병이다.
홍역_소, 백일해_돼지
신종인플루엔자A, 조류인플루엔자의 또 다른 변이.
2003년 미국에서 처음 발생했고, 2009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했다. 스위스 제약 회사 로슈홀딩이 특허권을 가지고 독점 생산하는, 국제보건기구로부터 유일한 조류인플루엔자 치료제로 인정받은 타미플루를 증상 발생 이후 48시간 이내에 복용해야 효과가 큼.
우리나라에서는 7,000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했고, 5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