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_필사발췌독/역사철학

로마인 이야기 2 (한니발 전쟁)_시오노 나나미

토르본크러셔 2022. 1. 1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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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2_한니발 전쟁] 시오노 나나미

: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33년에 이르는 130년 세월이 서술 대상

 

_바르카스(페니키아어로 번갯불이라는 뜻이다)라는 성을 가진 하밀카르가 바로 그였다. 30대 초반이었던 하밀카르는 나중에 로마인의 악몽이 된 한니발의 아버지이다. 하밀카르가 시칠리아 전선을 담당하게 된 기원전 247년은 전쟁사상 최고의 전술가로 꼽히는 한니발이 이 세상에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_ 기원전 264년부터 시작하여 23년 동안 계속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41년에 끝났따. 카툴루스는 그해 6월에 로마로 개선했다. 로마인도 평화를 만끽하는 데 열중했다. 기원전 673년부터 줄곧 열려 있던 야누스 신전의 문도 무려 432년 만에 닫혔다. 전쟁의 신 야누스 신은 이제 그만 쉬시라는 뜻이다.

 

_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기원전 241년에 끝난 제1차 포에니 전쟁과 기원전 218년에 일어난 제2차 포에니 전쟁 사이에 23년의 세월이 막간처럼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다.

 

_과거에는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이라고 불렸던 오늘날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에스파냐로 이주한 하밀카르는 이곳에서 탁월한 조직 능력을 발휘한다.

 

_시칠리아가 로마의 피지배 하에, ‘그리스 열풍

로마인의 남다른 점은 뭐든지 자기들이 다 하려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자기네가 제일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로마에 동화한 에트루리아인은 여전히 토목사업에서 솜씨를 발휘했고,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인은 통상을 맡고 있었다. 시칠리아가 세력하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그리스 문화가 도입된 이후로는 예술도 철학도 수학도 모두 그리스인에게 맡긴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로마인의 개방성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확대되어갔다.

 

_이제부터는 그리스식 호칭인 켈트족 대신 갈리아인이라고 부르겠다.

 

_로마식 군단, 로마 군단의 최소 전투 단위인 켄투리아(백인대), 백인대를 지휘하는 자가 고대 로마를 소재한 영화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백인대장’(켄투리오)이다.

 

따라서 로마 군단의 백인대장은 단순한 하사관이 아니었다. 그렇기는커녕 로마 군단의 주축으로 여겨진 것은 상급 지휘관인 장교가 아니라, 하급 지휘관인 백인대장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로마 군단의 최소 전투 단위인 소대의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는 책임자였다. 무장으로서 최고사령관의 능력은 백인대장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 명장들은 모두 백인대장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들을 수족처럼 다룰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_나중에도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한니발이 동시대인에 비해 단연 뛰어난 점은 정보의 중요성에 착안한 점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쪽에 사는 갈리아인과 프랑스 쪽에 사는 갈리아인들이 가축 따위를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왕래하고 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니발의 이 알프스 넘기는 모험이긴 했지만, 냉철한 계산을 토대로 하여 실행된 모험이었다.

 

한니발의 그후 행동을 상당히 자세하게 추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기록자를 동행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본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니발의 그리스어 교사이기도 한 그 기록자는 실레노스라는 이름의 그리스인이었다.

한편 로마 쪽에도 기록자가 있다. 한니발과는 동시대인으로, 원로원 의원을 지내고 있던 파비우스 픽토르가 그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의 저술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고대인이라면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니발이 46세 되던 해에 태어난 그리스인 폴리비오스와 그보다 200년 뒤에 살았던 로마인 리비우스는 둘 다 이 2대 일차사료를 참고했다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의 말에 따르면, 한니발이 카르타헤나를 떠날 때 이끌고 있던 병력은 보병 9만 명에 기병 12천 명, 그리고 코끼리 37마리였다.

그러나 29세의 젊은이는 이 많은 병력을 모두 이탈리아까지 데리고 갈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데려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군량 확보의 어려움이 예상되는 적지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실제로 에브로 강을 건넜을 때, 그는 피레네 산맥에서 에브로 강까지의 방위를 위해 보병 1만 명과 기병 1천 명을 남겨놓았다. 그와 동시에, 한니발은 먼 곳으로 끌려갈 것 같은 낌새를 채고 동요하기 시작한 에스파냐 병사들에게는 선선히 귀가를 허락했다. 한니발은 행군하는 것을 보고 병사를 선발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쪽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병력은 보병 5만 명에 기병 9천 명, 그리고 코끼리 37마리가 되어 있었다.

 

_ 한니발의 군대가 어느 경로를 통해 알프스를 넘었는지는 그후 22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리고 많은 연구자들이 필사적으로 탐구했지만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경로는 모두 여섯가지나 된다. 고대에도 이미 두 가지 설이 있었다.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오늘날의 피콜로산베르나르도 고개를 넘었다고 주장한다. 로마인 역사가 리비우스는 그보다 조금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는 몬지네브로 고개를 넘었다고 주장한다.

독일 역사가 몸젠은 폴리비오스의 설을 지지하고 있다. 한편,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로 알프스를 넘어본 경험이 있는 나폴레옹은 리비우스의 설을 지지했다.

폴리비오스의 설에 따르면, 그르노블을 떠난 한니발은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표고가 2188미터인 피콜로산베르나르도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가, 북쪽에서 토리노를 공략했다는 얘기가 된다.

반대로 리비우스의 설에 따르면, 그르노블에서 정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표고가 1854미터인 몬지네브로 고개를 통해 알프스를 넘은 다음, 수사 골짜기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 토리노로 쳐들어갔다는 얘기가 된다.

덧붙여 말하면, 알프스를 넘는 모험을 감행한 한니발이 마주친 진정한 어려움을 코끼리떼를 데리고 산을 넘는 일이었을 거라고 나폴레옹은 말했다. 실제로 한니발보다 160년 뒤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다. 한니발과는 반대로 이탈리아 쪽에서 프랑스 쪽으로 넘었지만.

 

_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아흐레째에 고갯마루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사람도 말도 코끼리도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다. 고갯마루 근처에 군대 전체가 쉴 만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29세의 총사령관은 병사들을 전부 집합시키고, 동쪽 방향을 가르키면서 말했다. 그쪽으로는 저 멀리 이탈리아가 푸른 하늘 밑에 희미하게 보였다.

저곳이 이탈리아다. 이탈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로마 성문 앞에 선 거나 마찬가지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내리막길뿐이다. 알프스를 다 넘은 뒤에 한두 번만 전투를 치르면, 우리는 이ᅟᅡᆯ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병사들의 표정에서 쌓이고 쌓인 피로와 불만이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이 역사적 사실을 공부했는지, 그보다 2천 년 뒤에 이탈리아로 쳐들어간 나폴레옹은 알프스 고개 위에서 병사들에게 이와 똑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다.

 

_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데 들인 날수는 전부 합하여 보름이었다고 한다. 뒷날 한니발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땅에 내려선 시점에서 그의 병력은 보병 2만 명과 기병 6천 명, 합계 26천 명이었다.

론 강을 건넌 시점에서는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46천 명이었으니까, 알프스를 넘으면서 치른 희생이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무려 2만 명이나 된 셈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은 시점과 비교하면, 뒤에 남기고 온 시체는 33천 명에 이른다. 일찍이 아무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이긴 했지만, 치른 희생도 엄청난 규모였다.

하지만 29세의 젊은이는 그것까지도 다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게 아닐까. 로마인의 본거지인 이탈리아를 전쟁터로 하려면, 아무리 희생이 크더라도 알프스를 넘어 북쪽에서 쳐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카르타헤나를 떠난 뒤 이탈리아 땅에 들어갈 때까지 넉 달리 걸렸다.

 

_ 나중에 대왕이라는 존칭을 받게 된 알렉산드로스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36천 명의 병력만 이끌고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으로 쳐들어갔다. 이 정도의 병력으로 그는 10만 내지 20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와 싸워서 두 번이나 승리했다. 페르시아의 전사자는 10만을 헤아린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손실은 200명 내지 300명에 불과했다. 0을 하나나 두 개쯤 빼먹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옛사람들은 과장되게 쓰는 버릇이 있었다지만, 완승이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_알렉산드로스, 그의 관심은 자기 군대가 가진 힘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다. 이것이 전쟁터에서 그가 이긴 요인이었다.

천재는 그 개인에게만 보이는 새로운사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뻔히 보면서도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떤 기존의사실을 깨닫는 사람이야말로 천재다.

 

_두번째 이유로는 당시 로마에 기병이 적었던 사정을 들 수 있다. 지중해 세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기병을 모으려 해도 전력이 될 수 있는 기병이 별로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에는 아펜니노 산맥 주변의 산악지대에 말 산지가 조금 있을 뿐이었다. 기병은 말 산지에서만 배출된다.

과학의 창시자인 그리스인이나 공학의 천재인 로마인이 생각해내지 못한 게 의아할 정도지만, 고대인들은 등자를 알지 못했다.

의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히포크라테스도, 고대 의학의 대성자인 갈레노스도 오랫동안 말에 올라타고 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있었기 때문에 울혈이 생긴 다리를 기사의 직업병이라고 말했다.

고대 기사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안장만 놓은 말에 걸터앉아, 등자라는 받침대도 없이 두 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였다. 축 늘어진 발로도 말 옆구리를 걷어찰 수는 있다. 따라서 등자가 없어도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있다.

하지만 말을 타면서 화살을 쏘거나 창으로 찌르려면 말등에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지 않으면 잘 되지 않는다. 등자가 필요한데, 등자가 없는 이상 두 다리로 말 옆구리를 힘껏 조여서 몸을 말 위에 고정시키는 특수한 기능이 필요했다. 이것은 어릴 적부터 훈련하지 않으면 도저히 습득할 수 없는 기술이다.

이렇게 되면, 기병이 될 수 있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말을 타고 산야를 뛰어다니는 말 산지의 출신자거나 아니면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한 집의 자제뿐이다. 로마의 세제에서 소유재산이 가장 많은 제1계급에 기병이 할당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면 등자는 서기 11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보급된다. 기사가 중세의 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등자가 출현한 덕분이었다.

 

_기원전 215년 봄, 오랫동안 로마의 믿음직한 친구였던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은 것은 15세밖에 안된 손자였따. 당장 내분이 일어났다. 한니발은 군대가 아니라 공작원을 파견했다. 쿠데타는 성공하고, 소년 군주는 살해되었따. 시라쿠사는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

시칠리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남부의 주요 도시를 들라면, 오늘날에는 나폴리와 팔레르모가 정답이지만, 기원전 3세기에는 카푸아와 타란토, 시라쿠사가 정답이었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 4년째에 카푸아와 시라쿠사를 한니발에게 빼앗긴 셈이다.

 

_(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의 이름은 로마군 사이에도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마르켈루스는 늙은이 하나한테 휘둘리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하고 한탄한 적도 있었다. 로마군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2200년 뒤의 고등학생들ᄁᆞ지도 수학이라는 골치아픈 학문으로 괴롭히게 되는 아르키메데스는 그해에 75세 안팎이었을 것이다.

 

_기원전 390년에 갈리아인이 침입한 이후 179년 동안 로마의 수도까지 적이 접근한 적은 한번도 없었따. 한니발의 이 대담한 시위에는 로마인들도 심장이 멎어버릴 만큼 놀랐다. 성벽 위로 몰려나온 로마인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백마를 탄 36세의 장군은 화살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거리에서 산책을 멈추지 않았다.

 

_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대 스키피오)는 코르넬리우스 가문이라는 로마 제일의 명문 귀족 출신이다. 이 가문은 집정관을 비롯한 주요 관리를 배출한 횟수에서는 발레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아이밀리우스 가문, 파비우스 가문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제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_지금까지 로마 중무장 보병의 주요 무기는 한쪽에만 날이 있는 긴 칼이었지만, 이 시기에 스키피오는 에스파냐 원주민이 사용하는 양날 단검을 도입했다. 이것은 훗날까지 에스파냐 칼이라고 불리며, 로마 중무장 보병의 공식 무기가 되었다.

_칸나에에서 참패당한 로마를 지구전 전술로 이끌어온 파비우스는 그해에 70세가 되어 있었따. 당초에 굼뜬 사내라는 뜻으로 붙여진 그의 별명 쿵크타토르는 이제 지구전주의자로 의미가 바뀌었고, ‘이탈리아의 방패라는 별명까지 얻은 파비우스는 원로원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누리며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로마 원로원에는 다른 의원들보다 우선하여 발언권을 갖는 1인자’(프린키페스)라는 제도가 있는데, 파비우스는 그동안 줄곧 1인자였다.

 

_나이가 사람을 완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사람을 완고하게 만든다. 성공자이기 때문에 완고한 사람은 변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어도,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 때문에 다른 길을 선택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근본적인 개혁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성공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만이 달성할 수 있다. 흔히 젊은 세대가 근본적인 개혁을 성취하는 것은 그들이 과거의 성공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_ 한니발이 귀환 명령을 받은 크로토네 항구에서 남쪽으로 뻗은 곶 위에 헤라 신전이 서 있다. 44세의 카르타고 장군은 귀국을 앞두고 이 신전의 제단 벽에 글씨를 새긴 동판을 박아넣으라고 명령했다. 동판에는 한니발이 에스파냐를 떠난 이후에 거둔 전과가 모두 기록되었다. 그로부터 50년 뒤에 이 땅을 찾아와 동판에 새겨진 글을 읽은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기록 덕분이다.

폴리비오스의 말에 따르면, 동판은 한가운데에서 둘로 나뉘어, 한쪽에는 카르타고 언어인 페니키아어,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어로 같은 내용의 글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인인 폴리비오스는 쉽게 그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페니키아어와 그리스어를 나란히 새겼을까. 그것도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따라간 학자가 발견한 로제타 돌에는 같은 내용의 글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민중문자 및 그리스어로 나란히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열쇠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로제타 돌은 기원전 196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니발이 동파네 페니키아어와 그리스어를 나란히 새겨 자신의 업적을 세상에 남기려 한 것은 기원전 203년의 일이다. 둘 사이에는 7년의 간격밖에 없다.

로제타 돌에 글자를 새긴 사람은 후세의 상형문자 해독에 도움을 주려고 그리스어를 병기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그리스어는 오늘날의 영어에 해당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로마인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리스인을 제패하게 되지만,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그리스인에게 제패당했기 때문에 자제들에게 그리스어를 제1 외국어로 습득케 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1세기에 후세 유럽 언어의 모델이 된 완벽한 라틴어가 완성된 뒤에도 2개 언어를 사용하는 로마인의 경향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당시 그들은 세계의 지배자였다. 그런데도 그리스어권에 사는 피정복 민족에게 라틴어 습득을 강요하지 않았따. 오히려 그들이 패배자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습득하는 데 열심이었다.

한니발로 로마 타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페니키아어와는 격이 다른 국제어인 그리스어를 병기하여, 29세부터 44세에 이를 때까지의 업적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_헬레니즘 세계의 왕국들

기원전 323년은 10년이라는 단기간에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넓은 지역을 제패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해다. 그의 대제국은 그후 휘하 장군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탄생했다. 그밖에 중간 규모의 왕조로 페르가몬이 있고, 그리스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도시국가들이 할거해 있었다.

 

_‘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의 관계. 로마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이 관계는 보호하는 자와 보호받는 자의 관계다. 다만 이 관계는 상호적 관계로서, 보호자도 경우에 따라서는 피보호자가 되기도 한다. 현실적인 로마인에게 어울리는 유연한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다.

신의를 기반으로 한 온건한 제국주의로 볼 수 있음. 그러나 이 노선의 주창자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실각함으로써 변화가 생김.

 

<스키피오 재판>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자신을 변호해준 젊은 그라쿠스에게 스키피오는 딸 코르넬리아를 시집보냈다. [로마인 이야기] 3권에서는 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가 최초의 주인공이 되어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로마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지향하게 되는 그라쿠스 형제는 명장 스키피오의 외손자가 된다.

기원전 183,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리테르노의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였다.

우연히도 같은해에 한니말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곳은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고 카르타고에서도 멀리 떨어진 흑해 연안의 비티니아였다. 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한 로마군의 한 부대장이 비티니아의 왕에게 한니발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했고, 이를 알게 된 한니발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독약을 마셨던 것이다. 희대의 전술가는 64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 한니발의 가장 출중한 제자였고 최대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스키피오는 아피아 가도 연변에 있는 스키피오 가문의 묘지에 매장되기를 거부했따. 대대로 내려오는 그 가족묘지가 로마 영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키피오의 유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그대는 내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리하여 스키피오도 한니발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2차 포에니 전쟁을 체험한 로마인들은 강철 같은 건강을 자랑하며 84세까지 장수한 카토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따. 로마도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_기원전 179,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로마의 온건한 제국주의노선을 허용하고 있던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가 세상을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기회 있을 때마다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표명한 맏아들 페르세오스였다. 전운은 다시 그리스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이후 600년이 넘도록, 로마는 패자라 해도 지상에서 말살하는 짓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원전 146년에는 코린트와 카르타고를 잇따라 지상에서 말살했따. 게다가 카르타고가 소멸한 지 13년 뒤에는 에스파냐의 누만티아도 카르타고와 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다. 이때의 총사령관도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였다.

 

기원전 146년에 소멸한 카르타고 영토는 그후로는 우티카에 주재하는 총독이 다스리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 지방은 이제 더 이상 카르타고라고 불리지 않고, 그 호칭은 속주 아프리카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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