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3 (승자의 혼미)_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3_승자의 혼미] 시오노 나나미
_ 서양에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있다. 아쉬울 것 없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태어났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역사상 ‘그라쿠스 형제’로 유명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야말로 기원전 2세기 후반의 로마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표현이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외조부가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조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도 노예 군단을 이끌고 로마 방위의 최전선에서 한니발과 맞서 ᄊᆞ우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전사한 용장이다. 그라쿠스 가문에서는 장자한테 티베리우스라는 이름을 물려주기 때문에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 이름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인데, 이 사람도 공화정 로마에서 기원전 2세기 전반에 활양한 위정자들 가운데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_ 그러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유력 가문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스키피오 가문이 속해 있는 코르넬리우스 일족,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배출한 클라우디우스 일족, 한니발에 대해서는 지구전 전술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속해 있는 파비우스 일족, 로마가 공화국이 되었을 때부터 명문인 발레리우스 일족, 그리고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배출한 율리우스 일족 등의 명문 귀족에 대해, 한니발에게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칼’로 칭송 받은 마르켈루스와 그라쿠스 같은 유력한 평민층 가문은 ‘평민 귀족’이라고 불러서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_ 그라쿠스는 또한 장인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갖고 있던 포로 로마노 안의 저택을 사들여, 그 자리에 그리스식 회당(바실리카)을 건설하게 했다. ‘바실리카 셈프로니아’라고 불린 이 회당은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같은 장소에 ‘바실리카 율리아’를 세울 때까지 존속했다.
_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의 양육은 어머리 코르넬리아의 세심한 배려 속에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아 자신도 당시 로마 교양인의 자격인 그리스어를 읽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두 개의 보석’이라고 부른 두 아들의 가정교사로 그리스에서 학자를 초빙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교사나 하인인 노예들에게 두 아들을 맡겨버린 것은 아니다. ‘자식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맡아보는 밥상머리에서도 자란다’고 말한 여자였다. 코르넬리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와 더불어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로마 여인의 귀감으로 칭송받게 된다. 두 아들은 이 어머니의 자상한 보살핌을 받으며 심신이 모두 아름답게 성장했다.
로마는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을 채택한 이후 귀족계급과 평민층 사이의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법’으로 모든 공직을 평민층에 개방하고, 기워전 287년에는 평민집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그대로 국법으로 삼는다고 규정한 ‘호르텐시우스 법’을 제정하여 귀족과 평민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평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호민관이 사임한 뒤에는 그를 원로원 의원으로 수용함으로써, 소수 지도 체제의 ‘소수’가 배타적이 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국론 분열을 방지해 왔다.
_ 공공사업도 ‘기사’들이 도급맡았다. 로마가 풍요로운 국가가 되어가고 있던 이 시기에 석회와 화산재를 혼합한 시멘트가 개발되었다. 기원전 190년부터 기원전 140년까지, 재판이나 상담이나 시민 집회를 위한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포르키아, 아이밀리아, 셈프로니아 등 세 개의 회당(바실리카)이 건설되었고, 신전은 재건축을 포함하여 8개가 건설되었다. 수도(水道)로는 전례가 없을 만큼 대규모인 마르키아노 수도가 기원전 144년에 건설되었고, 기원전 179년에는 테베레 강에 석조 다리가 놓였다. 이밖에도 도로 보수가 간척사업도 있었따. ‘기사’들은 동료끼리 합자회사를 조직하여 이런 대규모 사업을 맡았다.
_ 이 문제는 복지를 확충한다고 해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이들 실업자는 단순히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생활 수단을 잃은 자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온종일 통 속에 누워 있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 같은 인물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하다. 많은 보통 사람은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해 간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존심은 복지로는 절대로 회복할 수 없다.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일자리를 되찾아주는 것뿐이다.
로마 시민과 동맹시 시민 사이의 구별도 건재했다. 이것은 로마 시민에게는 시민의 의무로서 요구할 수 있는 일도 동맹시 시민에게는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동등한 권리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 동등한 의무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등한 의무를 부과하고 싶으면 동등한 권리도 주어야 했다. 권리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권리에 따르는 의무를 요구하면 내정 간섭이 된다.
_ 그러나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법치국가의 이념을 확립한 로마인은 법이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형편에 맞지 않으면 당연히 바꾸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따. 바꿀 경우에도 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는 하지 않는다. 기존의 법을 바꾸려면 왠지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기존의 법을 개정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법률을 성립시켜 종래의 법 가운데 새로운 법에 저촉되는 부분을 자연스레 해소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덕분에 로마는 법전을 전부 모으면 산더미처럼 쌓일 만큼 많은 법률을 가진 비성문법 국가가 되고 말았다.
법률은 제안자의 이름을 따서 불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컨대 그라쿠스가 제안한 법률이면 그라쿠스 가문이 속해 있는 셈프로니우스 일족의 이름을 따서 ‘셈프로니우스 법’(렉스 셈프로니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성립시킨 법이라면 ‘율리우스 법’(렉스 율리아)으로 통칭왼다. 많은 법률을 성립시킨 이 두 사람의 경우에는 ‘국유지에 관한 셈프로니우스 법’이나 ‘속주에 관한 셈프로니우스법’으로 구별하는 정도였다.
_ 형 티베리우스는 7개월, 동생 가이우스는 2년의 활동 기간(호민관)밖에 갖지 못했지만, 그리고 그동안 실행된 개혁들은 거의 다 물거품으로 끝나버렸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줄곧 성장의 길을 걸어왔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로마에 최초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적 존재이유다. 로마인들도 그후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결국에는 그라쿠스 형제가 세운 이정표에 따라 길을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의 아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고, 가이우스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라쿠스 가문은 여기서 대가 끊기고 말았다.
_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고귀하지도 유복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려다가 잇따라 죽은 해로부터 10년 뒤, 미천한 가문 출신의 한 사나이가 로마의 중앙 정계에 등장했따.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였따.
출생지도 로마가 아니었다. 로마와 나폴리를 잇는 간선도로에는 해변을 따라 달리는 아피아 가도와 내륙을 통해 남하하는 라티나 가도가 있는데, 그 길을 절반쯤 내려간 곳에서 가도를 벗어나 산길을 따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에 있는 아르피노에서 태어났다. 이곳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된 것은 기원전 188년에 이르러서였다. 마리우스가 태어나기 30년 전의 일이다. 이런 점에서 마리우스는 프랑스 영토가 된 직후의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과 비슷했다.
_ 남성의 경우, 로마 시민은 보통 세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개인 이름(프라이노멘), 일족 이름(노멘), 가문 이름(코그노멘)의 세 개다.
예컨대 티베리우스는 개인 이름으로, 셈프로니우스는 일족 이름, 그라쿠스는 가문 이름, 즉 성(姓)이다. 영어로 읽으면 줄리어스 시저가 되는 인물의 라틴어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인데, 어머니가 그를 부를 때는 “가이우스야, 밥 먹어라”하고 말했을 것이다.
_ 갈리아인이 살고 있던 루비콘 강 이북의 이탈리아 북부 일대는 이렇게 로마화되었다. 역시 갈리아인의 거주지역이었던 프로방스(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지방)도 같은 방식으로 로마화되었다. 로마의 속주로 변한 것이다. 프로방스라는 이름도 라틴어로 속주를 뜻하는 프로빈키아를 프랑스식으로 발음한 데 불과하다.
_ 가이우스 마리우스, 그리스어를 모르고 성장한 것 자체는 결함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어 습득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보기 드물게 뛰어난 장군인 그를 쓸데없는 열등감에 빠뜨리게 되었다. 확고부동한 자부심만이 열등감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지나친 열등감만큼 상황 판단을 그르치는 것은 없다.
_ ‘동맹시 전쟁’은 사실상 기원전 89년에 끝났다.
2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강철 같은 결속을 자랑했고, 한니발을 비롯한 외세조차도 그 사실을 인정한 바 있는 ‘로마 연합’은 마침내 해체되었다. 나폴리에 사는 그리스계 주민도, 토스카나 지방에 많이 사는 에트루리아인도, 이탈리아 반도를 등뼈처럼 달리는 아펜니노 산맥에 사는 산악 부족도 모두 로마 시민이 되었다. 이탈리아인(이탈리쿠스)은 이제 없어졌다. 이탈리아인이 되살아나려면, 이로부터 1천 950년 뒤에 근대 국가 이탈리아가 탄생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_ 민주정 체제의 아테네에서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이 아닌 한 아테네 시민권을 갖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따.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오랫동안 아테네에 살면서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창설하여 아테네 문화 향상에 이바지한 사람도 끝내 아테네 시민권은 얻지 못했다.
_ 킨나는 딸을 성년식을 갓 마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시집보냈다. 훗날의 영웅 카이사르도 당시에는 아직 16세였다. 16세의 신랑은 고모부인 마리우스의 처조카에 해당할 뿐 아니라, ‘율리우스 시민권법’의 제안자이면서 마리우스의 원한에 희생된 ‘동맹시 전쟁’ 당시의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이기도 했다. 킨나가 이 젊은이를 사위로 삼은 것은 평민 영웅 마리우스와 자신의 인연을 강화하는 동시에, 원로원 양식파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이기도 했다. 당시 로마의 상류층에서 결혼은 대부분 정략결혼이었다.
_ 마리우스 VS 술라
술라의 살생부에는 80명 가까운 원로원 의원과 1천 600명의 ‘기사(경제인)’를 포함하여 모두 4천 700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한다. 술라가 작성한 ‘살생부’에는 한 젊은이의 이름도 실려 있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도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라는 점에서 마땅히 처단해야 할 ‘민중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라의 측근들이 그를 살려줄 것을 부탁했다. 아버지도 없는 율리우스 가문의 후계자가 아직 18세에 불과하고, 정치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면서. 술라는 처음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살려주라는 탄원이 거듭되었고, 결국에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살생부’에서 젊은이의 이름을 지우면서 술라는 말했따.
“자네들은 모르겠나? 그 젊은이의 마음속에는 마리우스가 백 명이나 들어 있다는 것을.”
비범한 인물이었기에 비범한 인물을 꿰뚫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_ 예수 그리스도는 말했다.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지만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예수는 그 자신과 ‘신’을 믿지 않는 인간도 평등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종례의 역사관에 따르면 고대보다 당연히 진보했을 터인 중세부터 시작된 기독교 문명도 노예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다. 단지 기독교도의 노예화를 금지했을 뿐이다. 따라서 유대교도를 강제수용소에 가두는 것은 인도적으로는 ‘옳지 않을’지라도, 기독교적으로는 완전히 ‘옳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출입문 위에 걸려 있었듯이, 기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은 정신을 노동으로 단련함으로써 자유롭게 한다는 논리도 성립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든 안 믿은 인간에게는 ‘인권’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18세기의 계몽사상이다. 따라서 노예제도 폐지를 명시한 법률은 1772년에 영국에서 처음 제정된 이후 1888년 브라질에서 제정될 때까지 1세기 동안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법률은 생겼어도, 남의 예속화에 무신경한 정신까지 인간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_ 아우렐리우스 일족은 여자들까지도 그리스어를 해독할 줄 아는 학자 집안으로 유명했다. 철학이나 수학 연구는 그리스인에게 맡기고 있던 로마 사회에서 학자라면 곧 법률가를 의미한다. 코타 자신도 유식한 법학자였다. 덧붙여 말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도 아우렐리우스 일족 출신이다.
_ 술라는 직접 독재를 함으로써 장래의 독재에 대한 위험을 없애는 체제를 확립하려고 했다. 공화적 체제를 택한 로마에서는 독재관만이 ‘표’의 향방에 좌우되지 않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이 위정자들에게 확고한 정치적 목표를 요구하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확고한 정치적 목표가 없이 정치를 하면 정책은 전후좌우로 흔들리기 쉽고, 그 결과는 국력의 낭비로 이어진다.
_ 정치를 떠난 루쿨루스는 이제 정략결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우아한 독신 귀족은 계절이 바뀌면 그에 적당한 집으로 옮겨 살면서, 수집한 예술품이나 서적을 즐기고 남에게도 그 즐거움을 개방했다. 루쿨루스 저택 안에 있는 도서관은 거기에 관심을 가진 로마인이나 로마에 사는 그리스인들이 모여드는 살롱이 되었다.
그러나 루쿨루스의 이름이 후세에도 쓰이는 대명사가 된 것은 그가 실천한 미식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서구에서는 호화로운 미식을 ‘루쿨루스식’이라고 부른다.
루쿨루스는 요리에 필요한 비용에 따라 미식의 등급을 분류했따. 이것만은 군단을 통솔한 사람답다는 생각이 든다. 비용에 따른 미식의 등급은 식사를 하는 방의 이름으로 구별된다. 게다가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물고기나 새를 키우고, 야채와 과일과 치즈도 자영농장에서 재배하거나 만들었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단순히 먹는 행위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식사하는 방의 장식, 식사중에 연주되는 음악, 낭독되는 시,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 거기에 적합한 손님 선정, 이 모든 것의 조화로운 총합이 루쿨루스식 ‘식사’였다.
키케로도 폼페이우스도 몰랐지만, 아폴로 신의 이름을 딴 그 방에서의 식사는 등급별로 나뉜 미식 중에서도 최고급이었따. ‘아폴로실’에서 한 번 식사하는 데 드는 비용이 5만 드라크마였다고 한다. 평민의 연수입이 5천 드라크마 안팎이었던 시대다.
하지만 아무리 치열한 정치투쟁에 몰두해 있어도,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은 질박강건함을 찬양하고 호화로운 사생활을 경멸하는 경향이 강했따. 루쿨루스의 호사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긴 했지만, 존경은 받지 못했다.
_파르티아, 아르메니아, 폰토스라는 오리엔트의 3대 강국이 단결하면, 로마도 지중해를 ‘우리 바다(내해_마레 인테르눔)’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리엔트 지방이 일치단결하지 않는 것은 어제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다. 옥시덴트(서방)에서의 동맹은 약자를 편들어 강대국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오리엔트(동방)에서의 동맹은 강자 편에 빌붙어 약소국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_폼페이우스, 기원전 1세기의 ‘위대한 인물’은 지중해의 물결이 밀려오는 모든 지방을 로마의 속주나 동맹국으로 메우는 위업을 달성했따. 이 시기에 이르러 지중해는 실질적으로도 로마의 ‘내해(마레 인테르눔)’이 되었다.
그리스에서 르네상스까지의 역사에 정통한 예술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대표작이지만, [세계사에 관한 고찰]이라는 책도 썼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따금 역사는 갑자기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세계는 그후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런 위대한 개인엑 있어서는 보편과 특수, 멈추는 것과 움직이는 것이 한 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나 종교나 문화나 사회 위기를 구현하는 존재다.
위기에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 속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다.”
그런데 ‘위대한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부르크하르타가 말한 ‘하나의 인물’은 되지 못했다. 로마 역사상 ‘위대한 개인’이 된 인물은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