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_샐리 티스데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샐리 티스데일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위태로운 아름다움. 우리의 고충이 여기에 있다.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사라지ᅟᅵᆨ 때문에 아름답고 영원할 수 없어 고귀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늘 잊고 산다.
우리는 갖가지 재료로 화려하게 만든 조화보다 시들어 버리는 생화를 좋아하고, 금세 떨어져 발길에 차이고 말 단풍을 일부러 찾아가 구경하며, 산기슭 너머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넋 놓고 바라본다. 금세 사라지고 말 취약성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캐롤과 나는 스쿠버다이빙을 함께 하곤 했다. 스쿠버다이빙을 처음 시작할 때 뜻밖의 계시를 받았는데, 물속에 와전히 잠기기 전까지만 젖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수면에 떠서 수영할 때는 물과 공기, 그 둘의 차이를 의식한다. 젖은 피부와 첨벙이는 물과 축축한 머리 감촉을 느낀다. 하지만 물속에선 이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 속에는 죽음 외에 아무것도 없다! 참으로 난해한 표현이다. 이 말은, 어떤 것에 완전히 빠져들면 다른 것은 모두 사라진다는 뜻이다. 우리가 다른 것을 외면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지금 이 순간이다. 삶은 온전히 삶이고, 죽음은 온전히 죽음이다. 살아가든 죽어가든, 우리가 그 속에 완전히 잠겨 있으면 그 순간이 전부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논할 때 즐겨 언급하는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단순한 생활과 사색을 중심으로 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인간이 고통을 겪는 근본 원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멸의 두려움이 터무니없음을 보여주고자 사유 실험을 고안했다. 즉, 일단 소멸하고 나면 소멸을 안타까워할 수 없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무의 상태에서는 인식도, 의식도, 기억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때 에너지의 절반은 경청하는 데 써야 한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앞세우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뭐라고 말할지 궁리한다. 상대방이 말할 땐 귀를 쫑긋 세워라. 중간에 한 마디씩 던져라.
“그건 정말 어렵게 들리네요.”
“당신이 이 문제를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것 같아요.”
ᄄᆞᆫ 생각이 들려고 하면 정신을 차리고 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청하라. 질문을 던져서 궁금한 점을 해소하라.
“흠, 그 점은 좀 더 자세히 말해주세요.”
마음이 불안하면 얘기를 듣고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럴 땐 다시 얘기해 달라고 청하라.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임하라. 잘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으니 들은 말을 되짚어보라.
“당신도 두렵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이런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면 거의 다 왔다. 세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차분하게 임하라.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반복하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습관을 형성하고 경험을 통해 배우고 약점과 강점을 파악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가꿔나간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맞이하게 될 사람, 즉 미래의 나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가 확립되면 자신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고, 상대방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심약하든 취약하든 불안하든 간에. 준비가 됐든 안 됐든 간에.
자신의 부정적인 욕구나 감정에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다른 사람의 것으로 돌림으로써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방어기제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사’라 한다.
이런 탐색 과정을 뭐라고 부르든, 죽음의 이유에 대한 탐색은 각자가 수행해야 하는 과업이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타인의 임종 자리에서 강요해선 안 된다. 세상의 풍파는 함께 겪을지라도 빠져 나가는 길은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엔트로피는 자연 물질이 변형되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잉크 방울이 물에 떨어지면 잉크의 성질을 잃듯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 자연의 속성이자 근본 법칙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죽음은 사회적 사건으로 간주되었고, 지금도 많은 곳에서 공적인 일로 치러진다. 탄생과 죽음은 으레 사람들을 불러 보은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기 때문이다.
임종을 앞둔 사람이 작별 인사를 하면 정말로 떠날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당신도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 여러 번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당신의 감정적 니즈를 그에게 풀어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뜬금없이 용서를 구하지도 마라. (어떤 사람은 환자가 기억도 못하는 일을 거론하며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하기도 한다.)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일을 언급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라. 그런 일은 죽어가는 사람이 할 일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옛날 일을 꺼내 바로잡거나 해명하려 든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꺼내 대화를 주도할 떄가 아니다. 당신은 목격자이지 주인공이 아니다. 당신 짐은 당신이 져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짊어지라고 요구하지 마라. (my. 남은 사람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는데도?)
마리 하우는 <죽음, 마지막 방문>이라는 시에서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침내/ 누군가가 당신의 구두끈을 절대로 풀리지 않게 묶어주었다.”
나는 50년 전의 내가 아니다. 10년 전의 나도 아니고, 작년이나 어제의 나도 아니다. 나는 이 문장을 썼던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내가 죽을 것인가? 모든 것이,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하는 이 순간은 그 어느 순간보다 미스터리하고 강렬하다.
메멘토 모리, 라틴어로 ‘그대는 죽어야 할 운명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여러 MRI 연구 결과, 애도하는 뇌는 다른 감정과 다른 패턴을 보인다고 드러났다. 감정은 보통 뇌의 특정 부위만 밝히지만, 애통은 기억과 소화, 시각적 이미지 등 온갖 부위에 영향을 미친다. 애통은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있다. 심지어 죽을 만큼 아프게 할 수도 있다. ‘영원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드딩 이해하게 되다. 한꺼번에 아프다 말거나 어쩌다 잠깐 아프다 마는 게 안디ㅏ. 그냥 아프지 않은 순간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는 이제 더 좋은 곳으로 갔어. 너도 그만 털고 일어나야지.”
애통은 상실의 내적 경험이고, 한탄은 상실의 외적 표현이다. 둘을 합쳐 우리는 사별이라는 멋진 표현으로 부른다.
물론 애도하는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널 사랑해.”
“정말 안타까워.”
그중에서 가장 좋은 말은 바로 이거다.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니? 무슨 이야기든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