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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_게르하르트 슈타군

토르본크러셔 2022. 1. 1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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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_게르하르트 슈타군]

 

나는 이 책을 통해 종교를 주제로 한 비판적 대화에 당신을 초대하고자 한다. 종교를 믿건 믿지 않건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자각하든 못하든 결국에는 종교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백과사전을 보면 종교라는 단어는 라틴어 렐리지오에서 유래했고 그 뜻은 신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아주 유익한 정보가 나온다. 그러니까 종교는 두려움에 많은 영향을 받는 인간과 유일신 혹은 여러 신들의 영적인 관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종교는 일단 감정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것도 우리가 불쾌하게 여기는 두려움이다. 두려움과 공포에서는 긍정적인 것이 나오기 힘들다. 하지만 두려움이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도 있는데, 정확히 그런 일이 종교에서 일어난다. 두려움이 경외감으로 바뀌는 것이다. 창조자와 창조에 대한 경외감! (하지만 절대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적 체험을 통해 경외감으로 전환된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는 기원전 700~50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바빌로니아 시대의 것이다. 이 지도를 보면 땅은 대양 위에 떠다니는 납작한 원반 모양이고 이 원반의 중심에 바빌론이 자리하고 있다. 지도 제작자가 바빌론을 지도의 중심에 놓은 것은 일종의 종교적 행위로 해석할 수 있따. 이러한 행위는 현대인들의 세계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인간은 항상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진리. 그래야만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는 답답한 상태를 떨쳐 버릴 수 있다.

또 고대 바빌로니아의 지도에는 인간이 왜 종교적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담겨 있다. 인간은 안전과 보호를 보장받기 위해 중심이라는 확고한 위치를 갈망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만의 중심을 찾는 것, 그것은 오늘날에 많은 사람들이 손꼽는 종교의 주요 동기다. 가장자리에 있으면 혼란과 해체, 죽음의 위협에 맞닥뜨린다.

 

종교는 결속을, 결속은 공동체를 만든다. 이를 위한 수단은 의식과 제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과 금기 등 수많은 의무도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구성원에게 부과되는 제약이 많을수록 종교 단체를 향한 구성원의 헌신이 커진다.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는 건 인간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스스로 하잘것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뜻한다. 이 거대한 무한의 시공간에서 그 무엇도 인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누구나 문득 의문이 솟구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얼마 못 살고 죽을 텐데. 이처럼 무자비한 진리 앞에서 삶은 무의미한 버둥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이 순간, 현기증이 난다. 그래서 얼른 딴 생각을 한다.

그렇다. 우리의 영혼에는 깊은 구멍이 하나 있다. 그 구멍이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우리를 보며 하품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는 매일 열심히 그 구멍을 메운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텅 비는 것 같다. 영혼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먹고 마시고 사람을 만나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정체 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돈을 벌고 돈을 쓰고 운동을 하고 야외로 나가고 여행을 하고 오락을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우리는 죽을 것이다. 안간힘을 써서 구멍을 메워 놓았지만 어느새 다시 구멍이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한다.

이 구멍을 메우는 방편으로 유대교는 [토라], 즉 모세오경을 제시한다. 기독교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것이 복음서이고, 이슬람교에서는 [쿠란], 불교에서는 부처의 말씀, 힌두교에서는 [베다]. 이러한 경전들은 종교적 관점에서 생존의 의미를 보여 준다.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현존에 신의 계시로서 의미를 부여한다. 종교는 신의 말씀을 통해 의미를 약속한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라. 신이 있다고 해서 의미 찾기가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의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통해 무엇을 할까? 분명 죽음은 우리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죽음은 삶에 가장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언젠가 끝이 나기에 삶은 의미를 갖는다. 죽지 않는 영원한 삶보다 더 부조리한 삶은 생각할 수 없다. 의미는 삶의 유한성이 있어야만 탄생한다. 불교처럼, 죽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구원의 무로, 영원한 안식으로 사라지는 것. 하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는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 법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실존주의는 주장한다. 그 법칙이란 선과 인간성과 종교가 말하는 사랑을 기초로 한다. 의미는 선을 행할 때 나타난다. 이렇게 본다면 실존주의는 결국 휴머니즘이며 사회 참여의 철학이다.

 

언젠가 생명이 끝나고 죽음이 찾아온다. 자연은 인간이 죽든 토끼가 죽든 배나무가 죽든 관심이 없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자리가 마련되고, 이 새로운 생명은 죽은 생명을 먹고 산다. 모든 생명은 탄소로 이루어지며, 탄소는 늘 새로운 생물학적 순환 과정으로 유입된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이미 오래전 수많은 생명체 안에 존재했고, 앞으로도 다른 생명체의 물질적 기초로 활용될 것이다. 따라서 물질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불멸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태어날 시점에 우리 몸을 구성했던 원자들 중에서 지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몸은 지속적으로 구성 소재를 교체한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을 필요가 있는가? 명상과 정신 집중을 통해 장기적으로 다른(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신이나 우주를 자신에게로 초대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신이나 우주를 내 안으로 데리고 들어올 문은 바로 내 머릿속의 왼쪽 측두엽에 있다. 그래서 뇌과학자들은 왼쪽 측두엽을 가리켜 신의 모듈이라고 부른다. 아주 냉철하게 이야기하자면 신앙심이란 이 부분의 뇌를 활성화시키고 개척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한함이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여 죽음 너머를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설령 인간이 불멸의 존재였다 해도 불가해한 불멸성 너머로 인간은 고개를 내밀었을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고 싶지 않다는 동경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사방에 있으면서도 아무데도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네가 신을 포착했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다.”

신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계속 오가는 와중에만 말을 할 수 있거나 침묵할 수 있다. 신은 불확정성으로 확정된다. 때문에 모든 신에 관한 교리는 혼란스럽다. 성경에서 신은 신이 누구이며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야훼라고 답했다. ‘야훼나는 바로 나다혹은 나는 있는 자 그로다라는 뜻이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신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신 자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신은 우리가 신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는 인식은 우리가 이생에서 얻을 수 있는 신에 대한 최고의 깨달음이다.” 이 말은 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신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이미 실패가 포함되어 있다.

 

현대 최고의 물리학자 알레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스피노자를 숭배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물리 법칙뿐 아니라 포괄적인 윤리적 세계관을 탐구했다. 이러한 세계관은 경험 사실 전체를 포괄해야 한다. 물리학뿐 아니라 일상생활 전체를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진리 찾기는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이성만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도 던졌다. 무엇보다 신에 대한 질문이 그에 해당한다.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가 말한 대로 자연과 자연의 법칙에서 신의 현현을 보았기에 일생 동안 신이 다른 우주도 창조했을까 하는 문제에 매달렸다. 그러고는 다른 우주도 생각할 수 있지만, 신이 온갖 실험 끝에 다른 우주는 다 폐기해 버렸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신은 다른 우주가 아닌 이 우주를, 스피노자와 괴테와 아인슈타인을 배출하게 될 이 우주를 원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의 운명과 행동을 걱정하는 신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의 질서 정연한 조화에서 현현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

 

때문에 다윈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종이 다른 종에서 파생되었다면 왜 수많은 과도기적 형태들이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을까? 왜 그런 과도기적 형태들이 여러 지각층에 엄청난 양으로 매장되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실제로 1860, 그러니까 그의 책이 나온 지 1년 뒤 바이에른의 채석장에서 최초로 과도기적 형태의 생물 화석이 발견되었다. 쥐라기의 시조새였다. 이빨과 깃털이 있어 현재의 조류가 공룡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이후 다른 증거들이 속속 잇달았다. 다리가 달린 물고기 에우스테노프테론은 경골어류와 양서류의 중간 형태다. 양서류와 파충류를 연결하는 세이무리아, 그리고 포유류를 닮은 파충류인 수형류는 체온을 조절할 수 있느 종이 몇 가지나 되었다. 나아가 육지와 물속을 오갔던 달리는 고래암불로케투스는 고래가 육지에 살던 네 다리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아직도 진화의 사슬에는 빈틈이 많다. 특히 새로운 종의 탄생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다윈은 이렇게 물었다. ‘다른 종끼리 교배를 하면 새끼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문제는 지금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진화론의 또 다른 문제는 시간이다. 진화는 수백만 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보통의 학문 방법으로는 입증할 수가 없다. 진화는 관찰할 수도, 실험을 해 볼 수도 없다.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신의 아들로 보는 견해는 그리스인 바오로(바울) - 특이하게도 예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바로 그 사도 바오로 에게서 시작되었다. 현세의 여성(마리아)과 함께 아들을 낳은 신이라는 서사 구조는 유대교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의 추종자들은 비록 일련의 유대 율법과 거리를 두었지만 스스로를 유대교인이라고 생각하던 유대 종파의 일원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이 현세의 여성과 아이를 낳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고, 따라서 그리스 문화권 출신 유대인인 바오로 역시 그러한 신화 구조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바오로에 이르러서야 유대인 예수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바오로의 관념도 신과 반신들이 한동안 하계로 추방당하거나 자발적으로 하계로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서사 구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의 이야기에는 포도의 신이 등장한다. 스스로를 포도나무에 비유하고는 했던 그리스도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디오니소스 역시 전 세계가 자신을 숭배하게 되자 하늘로 올라가 신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의 오른쪽에 정좌한다.

유대인에게는 훗날 이슬람교도에게도 신이 두 존재(아버지와 아들)로 분열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령이 추가되어 둘이 셋으로 확대되고, 다시 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일종의 반신으로 추가되었다. 유일신이 사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성모)의 성향이 강한 삼위일체의 신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구약]의 신을 급진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더라면 예수의 제자들로 구성된 유대교 분파는 결코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예수가 아니라 바오로가 기독교의 창시자였다.

 

예수는 유대인으로 자랐다. 그래서 예수는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유일신 교리를 따르는 유대인이 자기 자신을 신의 혈육으로 여겼다는 것은 신앙적 모순이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고 부활했다는 교리는 그리스 출신의 유대인 사도 바오로로부터 유래되었다. 바오로는 그리스 신화의 전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덧씌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 가운데 기독교만이 신의 아들을 이야기한다.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 하는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진실은 신만이 아신다.

 

살다 보면 옳은 것보다 강한 것이 득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종교의 흔적은 약 5만 년 전의 것들이다. 동굴의 벽화, 부장품, 제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물건들..

 

세계적인 종교들은 종교끼리도 다른 모양새를 띠지만 한 종교 안에는 또 다양한 종파가 있다.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역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더구나 원래의 종교 교리들은 과학과 달리 정밀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성서의 언어는 신화적이고 시적이다. 종교는 문학에 근거를 두고 있고, 모든 문학이 그러하듯 해석 가능하다. 아니, 반드시 해석을 요한다. 종교는 종교적 계시를 해석한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성서들이 종교를 창시한 이가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 부처도 예수도 성서를 쓴 적이 없다. 예수가 실제로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복음서 저자인 마태오(마태), 마르코(마가), 루카(누가), 요한이 예수가 했다고 전해져 오는 말을 기록한 내용뿐이다. 유대교의 창시자인 모세 역시 그가 모세오경의 저자인지 확실하지 않다. 모세가 역사에 실존한 인물인지도 파악할 수 없다. 언어가 열린 체계인 만큼 문학에 근거를 둔 종교 역시 열린 정신 체계를 갖추고 있다.

 

매일 새 종파가 생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기독교 종파 조직들이 골칫거리다. 1만 개가 넘는 종파와 자유 교회들이 있고, 대부분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특히 대도시 빈민 지역을 근거지로 삼으며, 독재적이고 인간 경시적인 성향이 강하다.

 

자연과학은 신을 밀어내지 않는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고, 그러고 싶은 의지도 없다. 오히려 자연 과학은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자연의 가장 심오한 비밀이 종교에서 말하는 신적인 것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신이 부피와 수와 무게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기에 자연 과학은 그 창조의 계시를 드러낸다. 위대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1858~1947)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인에게는 시작에 신이 있고, 과학자에게는 마지막에 신에 관한 성찰이 있다.”

자연 과학과 종교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한다. 인식과 깨달음의 문을 여는 것! 이를 통해 인간은 이 우주에 몸담고 있는 자신의 현존과 세계 속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된다. 자기를 인식한다는 것은 종교는 물론 자연 과학의 추동력이기도 하다. 자연 과학에서 진행하는 관찰과 실험은 자기 관찰이자 자기 탐구다. 그냥 하늘을 쳐다보건 망원경을 들여다보건 별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이다.

 

* 과거 이슬람 공동체는 교육의 장소였기에 문화적으로 강성했다. “읽어라!” 그것이 무함마드의 계명이었다. [쿠란]은 무엇을 읽어야 할지 제한하지 않았다. 따라서 과거 이슬람교도들은 그리스의 자연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었고, 고대 페르시아, 인도, 중국인들의 저서를 연구했다. 그 결과 이슬람 세계에서는 자연 과학과 수학이 엄청나게 발달했다. 이슬람은 새로운 천문학과 지리학을 발전시켰고 수학의 곁가지들을 뻗어 나가게 했다.

하지만 15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종교학자들이 자연 과학에 제동을 걸었다. 앞으로는 [쿠란]에 씌어 있는 것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는 정신적 후퇴로 나타났다. 유럽이 르네상스에 돌입하면서, 그동안 기독교가 가로막았던 자연 과학과 수학적 지식을 열렬히 섭렵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였다. 두 세계의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 중세에 그리스-로마의 학문적 성과를 보존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자연 현상은 수학을 통해 드러난다. 수학은 신의 언어라 할 만하다.

 

* 종교인은 시작 지점에서 신을 만나고, 과학자는 마지막 지점에서 신을 만난다.

 

* 한때 세계의 문화와 과학을 이끌었떤 이슬람 세계는 15세기 무렵부터 근본주의로 회귀하면서 문명과 결별했다.

 

* 인간의 지식량이 늘어나면서 신앙은 약화되었지만, 자연 과학의 심오한 지식은 오히려 신앙심을 부추긴다.

 

* 가난 그 자체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능동적으로 선택한 가난만이 종교적 가치를 획득한다.

 

*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물질은 불멸이다. 우주에서 소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정신의 결과물 대부분이 무로 돌아간다.

 

* 모세의 형 아론은 유대 민족 최초의 사제였다. 선택받은 유대 민족의 첫 사제는 모세가 아니라 아론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그의 후손들이 사제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힌두교의 사제 계급 브라만처럼 대물림되었다. 하지만 유대교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사제에게 일반 신자보다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로서는 아주 특이한 경우다. 고대 유대교의 사제는 야훼에게 짐승 제물을 바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 그 이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선지자도 평범한 사람들을 넘어서는 특별한 신앙을 갖는다고 보지 않았다. 선지자는 신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지자도 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사제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슬람교는 아예 사제가 없다. 이슬람교의 제식은 혼자서 알라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전부인데 무엇 하러 사제가 필요하겠는가. 사실 사제는 복잡한 성사가 있는 곳에서만 필요하다. 사제와 일반 신도의 차이가 가장 확연한 종교는 불교다. 일반 신도, 즉 속세의 신자들이 출가 수행자 교단인 승가를 지지하고 따르는 구조를 취한다.

 

* 과거 유대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바리새인이라고 불렀다. 바리새인이란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아론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죄와 이교도의 잔혹함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뜻이 담겨 있다. 때문에 모든 유대인의 바리새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종교는 만인의 것이며, 모두가 신의 부름을 받아 종교에 이르렀다는 원래의 유대교적 시각이 함축된 말이다. 신은 유대 민족 전체를 선택했지 민족의 대표들만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교에 성자가 없는 이유도 아마 이런 시각 때문일 것이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사원을 파괴한 로마인들의 만행은 유대 민족으로서는 무시무시한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비극적 결과는 오히려 득이 되었다. 덕분에 혼자서, 어느 누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과 마주한다는 유대교의 가장 깊은 본질이 활짝 날개를 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원이 무너지면서 제식도 사라졌다. 제식이 없어지자 사제도 불필요해졌따. 사제가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다른 종교였다면 종교 전체의 몰락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성전이 파괴되고 사제들이 죽임을 당한 후 사라진 종교가 적지 않다. 그럴 경우 일반 신자들은 쉽사리 정복자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사제를 섬겼다. 유대교는 그렇지 않았다. 성전과 사제가 사라졌지만 신의 말씀은 [토라]라는 성서의 형태로 남았다. [토라]는 신과 마찬가지로 파괴될 수 없다. [토라]를 읽을 수 있는 누구나 [토라]를 계속 연구할 수 있었고, 계속 신계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유대교의 정신적 핵심은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다.

 

* 유대교에도 랍비가 있다. 랍비는 사제가 아니라 종교 선생, 즉 급료를 받고 유대 교구민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자면 랍비 제도는 고대 바리새인의 전통에서 출발했다. 고대의 바리새주의는 사원이 파괴되어 기도가 제물 의식의 자리를 차지한 후 일반 신자들의 운동인 랍비주의로 탈바꿈했다. 그를 통해 누구나 독자적인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옛 유대교의 교리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었다.

 

* 이렇게 본다면 다시 부활한 기독교의 사제 제도는 일종의 퇴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의 제물인 예수를 통해 이 퇴보도 정당화되는 듯하다. 실제로 가톡릭의 사제 제도는 이 장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는 기독교 최초의 사제로 해석할 수 있으며, 모든 사제는 예수의 뒤를 잇는다. 예수 안에서 신과 사제와 제물이 하나가 된다.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개신교는 약간 다른 모습을 띤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기독교를 다시 유대교의 교리, 특히 신자 모두가 사제라는 교리에 근접시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중세의 가톨릭이 사제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잃어버렸던 교구의 내적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했다. 루터는 다시 (유대인들의 [토라]가 그렇듯이) ‘신의 말씀을 유일한 구원 수단이라고 선언했다.

 

* 개신교에도 만인이 사제라는 루터의 원래(유대교적) 사상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종파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개신교 자유 교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침례교가 대표적인 경우다. 침례교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노선으로 삼으며, 누구나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의 말씀을 중계하고 전달할 사제가 필요하지 않다. [신약]에 따르면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가 성령을 담은 사람, 성직자. 세례와 더불어 모두가 사제로 부름을 받는 것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 종교 의식이 복잡해지면서 전문적으로 이를 담당하는 사람이 필요해졌다. 이것이 사제와 성직자의 출발이다.

 

* 이집트 문화권에서는 왕이 곧 신이자 최고의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이라는 삼위일체 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재현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 유대교는 개개인이 직접 신과 마주한다는 종교적 본질에 의해, 이슬람교는 종교 의식의 단순성으로 인해 특별히 사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마르틴 루터는 사제 집단에게 집중된 종교적 권위를 일반 신도들에게로 되돌리겠다는 목적에서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하지만 종교 개혁의 결과인 개신교는 오늘날 다시금 과거의 사제 제도에 기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 신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이슬람교도도 아니다. 종교는 철학이나 예술과 비슷하게 정신의 용광로다. 종교의 다양성은 좋은 징조이며 신의 뜻이기도 하다. 신은 한 가지 종교에만 끼워 넣기에는 너무나도 큰 존재다. 나아가 불가해성을 통해 신은 종교의 다양성을 끌어냈다. 인류의 문화는 수천 년 동안 나름의 방식으로 풀리지 않는 신의 수수께끼에 접근하려 노력해 왔다. 종교의 다양성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문화의 다양성도 인정하지 못하고, 결국 신의 불가해성 자체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증오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신이 불가해하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인간이 반목하는 것이지 종교가 반목하는 것이 아니다.

 

* 종교는 정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치와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을 확실히 밝혔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은 아주 세속적으로 본다면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살인이었다. 예수는 폭동을 꾀했다는 이유로 로마 식민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수십만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예수의 폭동에 대한 의심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종교 교리의 급진성에 원인이 있었다. 정치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로마 총독 빌리도는 전선에 있는 군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그는 최고 재판관이기 이전에 로마의 군인이었다. 로마에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일에 대해서는 당장 약식 재판을 열었고, 폭동을 사주한 자나 메시아의 후보자는 곧바로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예수가 겪은 일은 당시로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 오늘날 바티칸은 약 180개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평화 정책에 적극 참여하며 유엔의 상임 옵서버로서 공식 명칭은 스타토 델라 시타 델 바티카노줄여서 SCV. 조롱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약자를 세 크리스토 베데세(그리스도가 보신다면)’로 해석하기도 한다.

 

* 오히려 예수가 교회를 짓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이다. 신앙심 깊은 유대인이었던 예수에게 교회는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예수의 사상은 유대교의 굳건한 뿌리에서 자라났다. 그의 복음이 영원히 타당하고 감동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완전한 유대교의 의미에서 개개인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예수는 모든 인간을 교회라 부르는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개인의 자격으로 신에게 인도하려 했다. 유대교가 그렇다. 유대교에서는 모든 신자가 혼자서 신과 마주한다. 열 명의 (남성)신자가 함께 모여 기도하면 그것이 이미 교회’, 시너고그다. 시노고그는 만남의 장소이상의 의미가 없다.

 

* 19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에 민족 국가가 탄생하면서 비로소 교회 국가는 종말을 맞이한다. 1870년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를 점령했다. 교황 비오 9세에게는 바티칸의 궁과 정원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만 허락되었을 뿐 독립 국가는 인정되지 않았다. 1929년 라테란 협정으로 교황은 다시 작은 국가(세상에서 제일 작은 국가)를 얻게 되었지만, 로마를 이탈리아 정부의 소재지로 인정하고 과거의 중세 국가를 영원히 포기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교황권은 다시 초당파적인 권력이 되었다. 교황권이 세계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지만 완전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오늘날 교회 국가(바티칸 시국)에는 약 0.44세제곱킬로미터의 넓이에 약 85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국가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교황을 지지하는 신자의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약 10억 명을 넘어선다. 가톨릭교회는 구성원의 숫자 때문에라도 세계 정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 고대 인도의 그림이나 조각에는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연인들은 항상 쾌락과 황홀경과 정신적 몰입 상태에 있다. 사랑 성적 사랑 안에서 우주의 브라만(유일자, 즉 신)이 인간의 영혼(아트만)과 녹아 하나가 된다는 사상의 표현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황홀경 속에서 신과 하나가 되거나, 적어도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갖는 신비를 경험한다.

인도의 세 주신(세계를 창조하는 브라마, 세계를 지키는 비슈누, 세계를 파괴하는 시바) 중 하나인 시바는 신과 우주의 힘인 성이 가장 강력하게 표현된 신이다. 시바는 금욕하는 신이자 요가 수행자들의 대장이지만, 한편으로는 육감적인 아내(두르가)가 있고 생식의 신으로 남근의 상징을 달고 다니기 때문에 많은 고대 문화권에서 생식력의 상징이 되었다. 비록 파괴의 신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남근의 상징은 그가 가진 창조력 전체를 대변하며 아내 두르가도 여성의 창조력을 상징한다. 시바는 파괴하며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자다. 성도 이와 비슷하게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창조력으로, 하지만 (여성을 억누르는 남성의) 억압 수단으로.

 

* 이슬람 여성들이 몸을 가리를 베일에는 부르카, 히잡, 니캅, 차도르 등이 있다. 각 나라에 따라 신체의 노출 정도가 달라지고 베일의 종류도 달라진다.

 

* 여성과 성에 대한 이슬람의 폐쇄성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을 따른 결과다.

 

* [성경]의 원죄 이야기로 인해 기독교에서 여성은 창세부터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사실상의 기독교 창시자인 사도 바오로가 여성에 적대적이었던 사실 역시 여성에게는 불운이었다. 기독교 안에 잠재된 여성 혐오는 중세의 마녀 사냥으로 이어졌다.

 

* 한 번 더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모세오경에는 모세가 받은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의 성서 [토라]. 여기에 이스라엘 초기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들이 추가된다. 나머지 책들은 다른 현자들 여자는 없다! -, 이른바 선지자들이 받았다는 신의 계시들이다. 모세1(<창세기>)은 신의 세계 창조로 시작된다. 이 역시 역사서의 성격을 갖춘다. 세상의 처음을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인류사의 처음을, 마지막으로 유대 민족의 초기 역사를 들려준다. 따라서 [성경]은 역사서다.

 

* 하지만 시적 이미지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신화는 항상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표현이다. 신화는 풀리지 않은 인류의 문제를 설명하려는 노력이다. 세상은 어디에서 왔나?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왜 남자와 여자가 있는가? 왜 전쟁과 불행이 있나? 세상은 어디로 가는가? [성경]은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고, 그 대답은 당대의 지식수준을 반영한다. 누가 알겠는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도 먼 미래 사람들이 보면 신화의 수준에 불과할지.

[성경]3,000년에 걸친 재앙투성이 인류사를 견뎌 냈다는 사실은 그 속에 진리가 가득 담겨 있다는 증거다. [성경]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인도의 [우파니샤드][바가바드기타]처럼 [성경]도 시간을 초월한다. 신앙의 진리는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었던 불멸의 [성경] 속에 살아 숨 쉰다. 하지만 어쩌면 종교 진로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진리라는 점에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원한다면 신은 모든 인간에게 유일한 방식으로 말을 할 것이다. 과학의 진리는 이와 다르다. 과학의 진리는 만인에게 똑같은 것이어야 한다.

 

* 크리스마스는 인간의 본성이 신의 본성과 하나 됨 이것이야말로 크리스마스의 가장 심오한 의미다 을 축하하는 날이다. 신은 인간이 되었고, 이로써 인간 역시 신이 되었다. 일종의 놀라운 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 신비로운 교체는 12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 자정 미사에서 일어나며 인간을 근본으로부터 변화시킨다. 크리스마스의 더 심오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신의 인간됨을 통해 너의 삶을 신을 향해 변화하도록, 즉 너의 삶을 신격화하도록 자극받았음을 느껴라.”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평화와 사랑과 화목한 가정뿐 아니라 변화와 혁신과 발전을 생각하는 축제다. 결국 크리스마스는 만인의 가슴속에 자아의 신격화를 향한 동경을 일깨우고자 한다. 누구나 현세에 붙들려 있는 인간됨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신앙은 자신을 넘어 성장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 성탄절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지만, 사실 성탄절인 1225일은 로마인들이 숭배하던 태양신의 축제일에서 따온 것이다.

 

* 부활절은 예수가 죽음을 깨고 다시 살아났음을 기뻐하는 날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인 예수의 죽음과 달리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

 

* 성령 강림절은 교회의 창립 기념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기독교는 유대교와 영원히 결별했다. 하지만 성령 강림절이 유대교의 의미 있는 기념일인 칠칠절인 것은 두 종교의 깊은 관련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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