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_필사발췌독/클래식미술관

미학 오디세이 2_진중권

토르본크러셔 2022. 1. 1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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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2]

 

현대 예술은 폴 세잔(1839~1906)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대 예술가 중에서 세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가 현대 예술에 끼친 영향은 깊고 폭넓다.

 

_마티스-, 피카소-형태, 이 두 위대한 표지판은 위대한 목표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_칸딘스키

 

_피카소는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고, 마티스는 대상으로부터 색채를 해방시켰다.

 

_가령 같은 사물이라도 고전주의, 인상주의, 입체주의에서 얼마나 달라지는가? 예술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들은 대개 고전주의적 취향을 갖고 있어 현대 예술도 이 케케묵은 예술언어에 따라 해독하려 하는데, 이때 그 전형적인 반응이 나온다. 저게 뭘 그린 거냐?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물었다간 무식하단 소릴 듣는 게 요즘 분위기다.

 

_직관은 표상 혹은 이미지. 철학적으로 표상이란 더 이상 감각은 아니지만 아직 개념이 아닌 이미지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감각의 수준을 넘은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다.

 

_예술적 직관은 따로 있는 게 아니므로, 예술적 직관에 관한 학문은 일상적 직관에 관한 학문과 같다. 따라서 미학은 누구나 갖고 있는 일상적인 직관을 연구한다. 크로체는 미학을 토대로 정신 철학의 체계를 쌓아올린다. ? 미적 인식, 즉 직관적 인식은 모든 인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직관은 우리에게 현상의 세계를 제공하며, 개념은 예지계 즉 정신을 제공한다. 그러나 개념은 언제나 직관에서 출발하고, 또 그 안엔 언제나 직관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_순수지향적 대상이 드러내는 빈 곳을 채워 넣는 작업을 구체화라 부른다. 구체화를 통해 비로소 규정되지 않은 빈 곳이 채워지고, 균열 상태로 해체되어 있는 시점들이 하나의 연속된 시점으로 연결된다. 독자는 멍하니 책을 읽는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경험을 다 동원하여 문학 작품 속 앙상한 도식의 빈 곳을 능동적으로 채워야 한다. 이 구체화의 작업을 통해 문학 작품의 앙상한 도식은 비로소 아름다운 미적 대상으로 탄생한다.

 

_놀이처럼 예술 작품도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다. 즉 작품의 텍스트 자체는 닫혀 있어 그 누구도 그걸 변경할 수 없지만, 그 완결된 텍스트에서 저마다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낸다. 작품은 작가-텍스트-독자의 게임이다. 이 삼각형의 게임 속에서 독자는 늘 바뀐다. 물론 그때마다 게임의 내용과 의미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작품의 삶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다. 작품은 후세의 해석에 열려 있다. 따라서 작품이 가진 근원적 의미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시대마다 열어주는 각각의 의미가 다 근원적이다.

 

_비록 과거처럼 대상을 재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현대 회화는 여전히 미메시스적 성격을 갖고 있다.

가령 입체파의 회화를 생각해보자. 여러 개의 시점에 의해 대상이 조각조각 잘려, 도대체 뭘 재현하는지 알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파편화된 현대세계와, 소비를 위한 생산에서 비롯된 대상의 통일성의 파괴를 재현한다는 거다.

 

_칸트는 예술을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로 보았다. 그는 예술을 내용에서 분리시켜 형식으로 환원해버렸다. 그에게 예술의 목적은 진리가 아니라 감각적 쾌감을 주는 데 있었으며, 예술은 자연의 총아인 천재의 소산이었다. 그럼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건, 곧 천재의 체험을 수용자가 그대로 따라서 체험하는 게 된다. 이 형식주의적, 주관주의적, 쾌락주의적 노선이 바로 칸트 이래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서구 미학의 주된 노선이다.

 

_비트켄슈타인

왜 그는 초기의 견해를 포기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그의 철학이 가진 묘한 역설 때문이었을 거다. 그 역설이란 자연언어의 결함을 제거하려 한 그의 작업도 결국은 자연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사다리에 비유하며, 일단 지붕 위에 올라간 다음엔 그 사다리를 치워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은 이미 사다리를 치우기 전에 벌어졌다. 결함 투성이의 사다리를 타고서도 어쨌든 그는 지붕 위로 올라가지 않았는가!

 

_사실 예술의 법칙을 찾아내 알고리즘화하려는 시도는, 천재의 비밀을 찾아 모차르트의 작품을 샅샅이 해부했던 살리에리의 절망적인 노력을 연상케 한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따라갈 수 없었던 살리에리처럼, 우리의 현대판 살리에리(컴퓨터)도 어느 날 스크린에 이런 메시지를 띄울지도 모른다. “인간이여, 내게 예술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왜 재능은 입력하지 않으셨습니까!”

 

_참이면 거짓이 되는 이 현상은 후에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라 불린다. 크레타섬의 에피메니데스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오느 날 이 친구가 철학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언을 남긴다. 그는 이 말 한마디로 그 이름이 수천 년의 세월과 지구 반 바퀴의 거리를 넘어 우리에게 알려지는 영광을 안게 되는데, 실망스럽게도 그 명언은 별게 아니다.

 

_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는 바로 인간 지성의 한계를 탐험한 책이다. 수학자와 판화가와 작곡가. 이들을 함께 묶어 영원한 황금실이라 불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악마의 고리라는 동일한 주제를 세 개의 다른 악기로 연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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