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_필사발췌독/역사철학

곰브리치 세계사_에른스트 곰브리치

토르본크러셔 2022. 1. 14.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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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_에른스트 h. 곰브리치]

 

부담 없이 느슨한 마음으로 잃어 나가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꼬치꼬치 질문을 하지 않으리란 점도 약속하겠다.

 

북유럽이 라플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일부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북부 지역

 

강물 사이의 나라를 뜻하는 그리스 어가 바로 메소포타미아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은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든다.

 

바빌로니아 인과 아시리아 인은 별들의 움직임을 꾸준히 관찰하고 미래를 점치는 점성술을 발달시킴.

마르스(화성), 메르쿠리우스(수성), 주피터(목성), 베누스(금성), 사투르누스(토성), 일요일(해의 날), 월요일(달의 날)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은 페니키아(티루스와 시돈에 살던 민족의 이름) 상인들이 고향에 편지 보낼 때 썼던 문자!

 

독일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_옛 그리스의 호메로스 서사시_미케네에서 왕의 궁전과 무담과 갑옷과 방패를 발견함. 이 모든 이야기는 한갓 허구가 아님이 밝혀졌던 것

 

마라톤의 기원

페르시아 함대_아테네군의 사령과 밀티아데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물리쳤지만 무방비 상태의 아테네로 뱃머리를 돌린 것이라는 것을 간파

다행히도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의 해로는 육로보다 멀었다. 좁고 길쭉한 반도를 돌아서 배를 몰아야했기 때문이다. 밀티아데스는 전령에게 죽을힘을 다해 육로를 달려가서 아테네 인들에게 경고하라고 명했다.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 달려간 전령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그 자리에 쓰려져 죽고 말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라톤 경주는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화산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델포이의 지반에는 땅속 증기를 뿜어내는 구멍이 있었다. 증기를 들이마신 사람은 정신이 혼미해져서 술 취한 사람이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두서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런데 의미 없는 듯한 이런 말이 그리스 인에게는 지극히 신비롭게 여겨졌따. 그들은 신이 인간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증기가 나오는 지반의 구멍 위에 삼발의자를 갖다 놓고 피티아라 불리는 여사제를 한 명 앉혔다. 피티아가 몽롱한 상태로 웅얼거리면 다른 남자 사제들이 그 말을 해석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 인들은 미래를 예언했는데, 이를 델포이의 신탁이라 한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흐릿하고 모호한 대답을 하면 신탁 같다.”고 놀리곤 한다.

 

기원전 500년경, 고타마 왕자, ‘부처’, 깨달은 사람

 

필리포스로부터 그리스와 고향인 마케도니아를 상속받은 새로운 왕은 스무 살도 안 된 청년으로 이름은 알렉산드로스였다. 그의 스승이 바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였따.

 

고르디우스의 매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소아시아 정복 과정에서 생겨난 유명한 이야기

고르디움이라는 도시의 한 신전에는 오래된 전차가 한 대 있었는데, 그 끌채에는 단단하고 복잡하게 얽힌 매듭이 하나 묶여 있었다. 그리고 이 매듭을 풀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 오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검을 빼들어 매듭을 반토막 내버렸다. 이 행동은 내가 검을 쥐고 세상을 정복하여 예언을 실현하겠다.”는 뜻이었따.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실제로 세상을 정복했다.

 

피로스의 승리

이런 승리라면 두 번 다시 누리고 싶지 않다.” 그 후로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를 일컬음.

피로스는 그리스의 영주, 남부 이탈리아를 도와 로마군단을 격퇴했지만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치름

 

에스파냐에는 카르타고의 군대가 있었는데, 그 사령관의 아들은 한니발이라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한니발은 충직한 카르타고 인이었기 때문에 조국을 억누르려는 로마 인을 미워했따. 그리고 이제 로마 인이 에스파냐에도 눈독을 들이자 그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코끼리 떼를 이끌고 알프스의 몽스니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로마인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에 한니발이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71년 로마 인의 사랑을 받는 새로운 사령관이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으뜸인 인물은 단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당시 갈리아라 불렸던 프랑스를 정벌해 로마 제국의 속주로 삼았다. 이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그는 이집트의 아름다운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친분을 맺고 이집트를 로마 제국에 통합시켰다.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질서를 철저히 정비했을 뿐 아니라 시간의 질서로 새롭게 정리했다. 바로 새로운 달력을 도입한 것이다. 이 달력은 1년을 열두 달로 나누고 윤년을 둔 것으로,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달력과 거의 같았다. 이 달력은 그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이라 불린다. 또한 1년 중의 한 달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따. 그는 아주 위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7월은 줄라이(july)이고 독일어로는 율리(Juli)이다. 그러니까 7월을 뜻하는 서양의 단어는 대머리에 황금 월계관을 즐겨 썼던 깡마른 남자, 비록 몸은 병약했지만 의지가 굳고 두뇌도 명석했던 한 남자의 이름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이다.

 

로마, 서기 161년부터 180년까지 통치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이자 철학자

그가 전쟁터에서 쓴 일기가 아직 남아있다.

도나우 강 건너의 적을 쫓기 위해 사자를 풀었는데 한 번도 이 동물을 본 적이 없던 게르만 족은 이 커다란 개들을 그냥 때려 죽여 버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전쟁을 치르던 중 빈도보나에서 사망했다.

 

일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제 중 한 사람이었던 막센티우스와 전투를 앞두고 어떤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십자가를 보았으며 이 상징과 함께 승리하리라란 말도 들었다. 이 전투에서 실제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13년에 크리스트교 박해를 금지했다.

 

기묘하게도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이름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였다. 로마를 건국한 첫 번째 왕의 이름은 로물수스였고, 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다. 그런데 이 두 이름이 마지막 황제의 이름에 셖여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는 서기 476년에 폐위되었다.

 

무함마드, 아랍어로 알라라 불리는 신 이외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복종은 아랍어로 이슬람인데, 무함마드는 자신의 교리를 이슬람이라 불렀다. 경정은 코란’, 무함마드는 예언자.

 

프랑크 왕국의 유명한 왕 카롤루스 대제(이는 라틴어 이름이며 샤를마뉴 대제라고 불림)

프랑크 왕국은 당시 독일 서부와 프랑스 동부를 포괄하는 나라.

위대한 황제란 의미로 대제라 불림. 서기 768년 왕위에 오름.

 

북방의 뱃사람들인 노르만 족의 일부는 윌리엄이라는 왕의 지휘 아래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해협을 건너가 (덴마크 왕크누트의 후손인) 영국 왕을 제압했다. 이후 윌리엄은 정복왕 윙ㄹ리엄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때가 서기 1066년인데, 이 연도를 모르는 영국인은 거의 없다. 이민족 군대가 영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노르만 족은 영국의 귀족이 되었따. 이들 노르만 족이 프랑스 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영어는 게르만 어와 로맨스 어가 합쳐진 언어가 되었다.

 

중세의 시점으로 간주되는 서기 476,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시기

근대의 시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1012일 새벽 2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 아즈텍 제국의 몬테수마 2

 

당시 독일의 비텐베르크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속한 마르틴 루터라는 수도사가 살았다. 1517년 면죄부 장사꾼들, 95개조 반박문

루터의 종교개혁

바이에른에서는 바이에른 방언으로 말했고, 작센에서는 작센 방언을 사용했다. 그래서 루터는 모단 사람이 똑같이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를 창안했다. 그가 성서 번역 과정에서 만든 이 독일어는 40녀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별다른 변화를 겪지 않고 표준어로 사용된다.

 

영국에는 아주 엄격하고 신앙심이 투철한 프로테스탄트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들은 청결한 사람들이란 뜻에서 청교도라 불렸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실제로 다스린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뿐이었고, 독일은 바이에른이나 작센 등의 크고 작은 공국으로 나뉘어 여러 제후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공국들은 삼십년 전쟁 이후로 빈의 가톨릭 황제를 우습게 여겼따. 이런 프로테스탄트 제후국들 중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가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1640년에서 1688년까지 재위한 위대한 지배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덕분에 스웨덴에 빼앗겼던 북부 독일의 땅을 차츰 되찾아갔다. 그리고 1701년부터 프로이센의 제후는 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 피뢰침 발명1776년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신성한 인권을 신생 국가의 기본법으로 천명했다. 하지만 흑인 노예를 부리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프랑스식으로 보나파르트라 불리는 나폴레옹 장군.

나폴레옹은 독일에서도 모든 권력을 장악했따. 얼마 후 프란츠 황제는 독일 황제의 칭호를 포기했따. 카롤루스 대제의 로마 대관식에서 시작된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이렇게 종말을 고했다.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는 이제부터 오스트리아 황제로만 불렸다.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인 괴테는 당시 이런 말을 했다. “그대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만 흔드시오. 그 사람은 그대들이 맞서기에는 넘 위대하오.” 그 자신을 무너뜨린 것은 그 자신의 지타친 명예욕이었다. 러시아에 패배

 

전신의 발명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이미 1753년에 어느 학자가 전신의 가능성을 연구했고, 1770년 이후로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 성과가 이뤄진 때는 1837년으로, 당시 미국의 화가 모스가 친구들에게 짧은 전보를 보냈다. 그 뒤 10년도 채 안 되어 여러 나라가 전신을 도입했다.

 

최초의 방적기는 1740년에 탄생했고 1783년에 개량되었으며 1825년에 와서야 비로소 이용할 수 있는 기계가 만들어졌다.

 

1848년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그리하여 각 공국의 공작들은 퇴위했고 1866년 이탈리아는 마침내 통일국가가 되었다. 단 한 곳은 통일 국가에서 제외되었으니 바로 교황에게 속한 수도 로마였다.

북쪽의 세력이란 바로 프로이센이고, 이 나라의 재상은 비스마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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