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1_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1_시오노 나나미]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150년 무렵, 폴리비오스는 40장으로 이루어진 [역사]를 저술했다. 그때까지의 역사 기록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동지중해 세계를 주로 다룬 반면, 폴리비오스의 [역사]는 로마로 눈길을 돌렸다. 그것도 실증적인 시각에서 초점을 맞춘 최초의 역사 기록이 되었다. 로마를 서술한 본격적인 역사서로서 신뢰할 만한 최초의 작품은 이리하여 외국인인 그리스인의 손으로 씌어졌던 것이다.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테살리아의 왕 아킬레우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 틍틀어 아카이아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기원전 1250년 전후에 일어나 10년 동안의 포위전을 거쳐 끝나는 트로이 원정의 주인공들이었다.
기원전 776년에 제1회 올림피아 경기가 열렸다. 4년에 한번씩 전투를 그만두고 올림피아 땅에 모여 체육대회를 즐겼다는 것은 그밖의 시기에는 노상 전투를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정치 개혁 이후로는 자기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에다 소속된 데모(구)의 이름을 붙인 것이 아테네 시민의 정식 이름이 되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알로페케 데모의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가 된다. 소속된 가문이나 씨족을 나타내는 명칭은 완전히 사라졌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이 ‘민주적’이라고 일컫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쨌든 이 시기에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시민이 국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탄생했다. 후세는 이것을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시민 개개인이 권력 행사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살펴보아도, 타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규모가 크고 중요한 국가에서 이런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한 것은 이 시기의 아테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악법이라도 조국의 법률에 따르겠다고 말하면서, 도망치라는 권유도 물리치고 사약을 마셨다. 같은 철학자라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고 재빨리 도망쳤다. 아테네 시민인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는 조국이었지만, 아테네 태생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법률을 위해 목숨을 버릴 의리는 없었던 것이다.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마지막 신분은 ‘헬로트’라고 부르는 농노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도리아인이 침략하기 전에 스파르타에 살았던 선주민이다. 그리스 청동기 문명의 주역이었던 이들도 철기를 가진 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뒤로는 비록 노예는 아니었지만 농노나 예농이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는 헬로트 신세를 감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결혼할 수 있는 권리 외에는 참정권이나 사유재산권, 재판권 등 시민이 누리는 권리를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시민의 의무인 병역조차 부과되지 않았다. 스파르타 시민이 소유한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 이들에게 인정된 유일한 직업이었다.
스파르타인과 페리오이코이(상공업 종사, 도리아인도 아니고 선주민도 아님. 아마 정복자인 도리아 민족을 따라와서 이곳에 정착한 타지방 출신의 그리스인이었을 것)와 헬로트의 인구 비율은 1대 7대 16 정도였다고 한다. 이 인구 비율이 스파르타의 모든 것을 규정했다.
군사와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왕은 스파르타의 두 명문 출신이 맡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한 명씩 교대로 왕위에 앉는 것이 아니라 두 명이 동시에 왕 노릇을 하는 세습제 쌍두정치다. 따라서 한 명의 왕이 다스리는 군주정치라는 뜻을 가진 ‘모나르키아’가 아니라 두 군주가 지배하는 정치체제라는 의미에서 ‘디아르키아’라고 불렀다.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 무렵, 오리엔트 전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의 왕은 덕이 높은 아후라 마즈다 신한테서 완전한 지배권을 부여받은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 나라의 왕에 머물지 않고 ‘왕중왕’이라고 일컬었다. 이 ‘왕중왕’이 통치하는 정치체제에서 보면, 내분만 일삼고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민주정치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따라서 그리스인을 이 ‘악몽’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은 신의 뜻에 부합한다고 페르시아인들은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는 기원전 460년부터 기원전 430년까지 30년 동안이다. 후진국 로마의 원로원 의원 세 명이 선진국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방문한 것은 기원전 453년부터 기원전 452년까지 1년 동안이라고 한다. 페리클레스 시대 말년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이 불을 뿜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돌입하지만, 이것은 기원전 431년의 일이다.
테베레 강 동쪽 연안에 모여 있는 일곱 언덕과 ‘포로 로마노’는 한번도 적에게 짓밟힌 적이 없었다. 기원전 390년 여름에 쳐들어온 켈트족이 사상 처음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로마가 두 번째로 적에게 짓밟히기까지는 로마 제정 말기인 서기 410년에 역시 야만족인 서고트족이 침입할 때까지 800년을 기다려야 한다.
기원전 431년~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해군이 강한 나라로 자타가 인정해온 아테네가 육군이 강한 스파르타와 벌인 해전에서 불명예스럽게도 패배한 것이 27년이나 계속된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따. 아테네는 바다에서도 스파르타를 이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기원전 371년에 스파르타는 패권을 잃고, 테베가 스파르타를 대신하여 패권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테베의 패권 시대도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 동안 아테네는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문화국가로도 일급이었지만, 정치가 갈피를 잡지 모하고 계속 혼돈을 거듭했기 때문에 그리스를 이끌어갈 만한 세력을 되지 못했다. 이리하여 폴리스의 영광스러운 역사는 마침내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기원전 362년, 그리스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의 손에 넘어갔다. 마케도니아는 왕정이기 때문에 도시국가는 아니다. 기원전 356년, 그 마케도니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난다.
독재관을 다섯 번이나 역임한 카밀루스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우선 적과 싸워서 지는 법이 없다는 말까지 들은 그의 전적일 것이다.
그 결과가 네 번의 개선식이다. 작은 전투에서 이긴 정도로는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으니까, 네 번이나 되는 개선식은 뛰어난 승리를 의미했다. 로마인은 한번이라도 개선식을 올리면 평생의 영관으로 생각했따. 로물루스에 뒤이어 제2의 건국자라는 말까지 들은 카밀루스였기에, 네 필의 백마를 몰고 개선식을 거행해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원전 367년, 로마 역사상 획기적인 법률인 ‘리키니우스 법’이 성립되었다. 이 법은 우선 여섯 명의 군사 담당관 제도를 폐지하고, 다시 두 명의 집정관 제도로 돌아갈 것을 규정했다. 로마는 앞으로도 과두정치, 즉 소수 지도체제로 해나갈 것임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은 기원전 4세기 중엽에 귀족계급의 아성에서 벗어났다. 원로원 의원에게는 출신 가문도 성장기의 교육도 문제삼지 않게 되었따. 경험과 능력만이 문제가 될 뿐이었따. 원래 세습은 아니었으니까, 좀더 순수하게 경험과 능력이 뛰어난 자들의 집단으로 바뀔 수 있었다.
그 이후의 로마는 귀족정치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과두정치 체제가 된다. 귀족정치란 귀족으로 태어난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지만, 과두정치는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다스리는 점은 마찬가지일지라도 그 소수의 혈통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로마는 더 이상 헤매지 않고 이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도 “무기를 갖지 않은 예언자는 자멸한다”고 말했다. 트로이의 왕녀 카산드라는 트로이가 그리스군에게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그것을 막기 위핸 대책을 트로이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설득만 하면 들어줄 거라고 믿는 사람을 ‘카산드라’라고 부른다.
위기관리 체제인 이상, 로마는 독재관을 남발하지 않았다. 공화정으로 이행한 기원전 509년부터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의 침략을 받을 때까지 119년 동안, 독재관은 일곱 번밖에 지명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섯 번이나 독재관을 지낸 카밀루스의 사례는 플루타르코스도 말했듯이 기원전 390년 직후에 로마를 덮친 위기와 혼미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로마를 해설하는 학자들이 싫증도 내지 않고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이때도 로마인은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나아가는 방식을 고수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이 훌륭한 것은 알지만, “가난한 것은 수치가 아니다. 하지만 가난에 안주하는 것은 수치다”라는 페리클레스의 말에 나는 공감한다. 또한 기독교의 가치관을 통해 로마를 보아서는 기독교를 몰랐던 시대의 로마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패자까지 포용하여 동화시키는 로마인의 생활 방식이야말로 로마가 융성한 요인이라고 단언했다. 플루타르코스의 모국인 그리스에서는 그리스인이 아닌 민족을 바르바로이(야만인)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같은 그리스인 사이에서도 스파르타 출신이 아테네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들 세 사람의 지적은 모두 옳은 것처럼 여겨진다. 로마가 융성한 요인을 찾는다면, 이 세 가지를 전부 들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디오니시오스가 거론한 종교, 폴리비오스가 지적한 정치체제, 플루타르코스가 말한 포용력은 모두 고대에는 이례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로마인의 개방적인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떤 로마인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방적인 성향이 아닐까. 로마인의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개방성이 아닐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속담을 “장미라면 언젠가는 꽃을 피운다”고 표현한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었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270년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로마인 이야기1은 이 500년의 세월을 다루고 있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59년에 태어나 서기 17년에 죽은 어엿한 로마 시민이다. 비록 한 권의 분량은 적지만, 평생 142권에 이르는 [로마사]를 썼다. 중세 암흑시대를 거치는 동안 대부분 소실 모두 서른 세 권 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