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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넓얕 0_채사장

독서_필사발췌독/인문사회과학

by 토르본크러셔 2022. 1. 1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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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_채사장]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

 

파잔(phajaan)은 코끼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의식이다. 야생에서 잡은 아기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하는 의식. 절반의 코끼리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지만, 강인한 코끼리를 살아남아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코끼리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본능의 심연에서 어렴풋하게 냉혹한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엄마를 찾아선 안 된다는 것과, 몽둥이의 고통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코끼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호킹 박사의 강연은 시간과 공간의 출발점이 없을 수 있다, 즉 신을 그 뒤로 숨겨줄 만한 창조의 순간 같은 건 우주의 역사에서 없을 수도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호킹 박사는 빅뱅 이전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북극을 하나의 끝 지점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 지구 위의 한 점에서 출발해 북극을 향해 직선으로 걸어간다고 생각해보자. 극점에 점차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어떤 끝 혹은 어떤 처음, 0에 수렴하는 곳으로 간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북극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알게 된다. 북극이 사실은 지구 표면의 수많은 다른 지점과 다를 것 없는 하나의 지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호킹 박사는 수학적으로 허수 시간을 도입함으로써 처음과 끝이라는 특이점을 갖지 않는 완만한 우주의 시간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무한한 우주를 담아내려 하고, 우주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까? 가장 심오하고 초월적인 답은 이 정도일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자기반성 과정이다.” 여기서의 자기반성이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생각해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반성은 스스로와 대면하는 사유 과정을 말한다. 마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유의 출발점이자, 최소 조건이 된다. 당신이 사유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객관적 대상으로 마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주는 138억 년의 시간 동안 깊은 침묵 속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때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우주가 자기 안에 우주에 대해 사유하는 존재, 즉 인간을 잉태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우리가 한 평 남짓의 공간에 앉아 우주의 탄생과 종말, 팽창과 수축을 상상하는 이유, 자신의 내면 안에 무한한 우주를 담아내려 하고 우주의 의미를 이해하려 하는 진정한 이유는 어쩌면 우주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빅뱅 이전의 시간, ‘시간 이전의 시간

138(빅뱅) - 46(지구) - 38(생명) - 4(인류) - 4천년(문명, 인류 역사에서 0.000043% 시간)

 

특히 양자역학이 자연 현상에 관찰자를 끌어들이는 점을 인정하지 못했다. 쉽게 말해서, 양자역학에 따르면 아주 작은 미시 세계의 대상들은 우리가 보는지, 보지 않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 그것이 말이 되는가? 예를 들어 소립자가 우리가 관측하지 않을 때는 물결과 같은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측하기 시작하면 야구공 같은 입자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근대 물리학자들은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양자역학자들의 승리였다. 이후에 이루어진 실제 실험 결과들은 양자역학의 예측에 정확히 부합했다. 기세등등해진 양자역학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아예 선언을 했다. 이것이 근대 물리학이 막을 내리고 현대 물리학으로 전환하게 한 코펜하겐 해석이다. 양자물리학자들은 덴마크 코펜하겐에 모여 이렇게 선언했다. “소립자들은 여러 상태가 확률적으로 겹쳐 있는 파동함수로 존재하고 있다가, 관찰자가 측정을 시작하면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하나의 상태로 결정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

준비물: 얌전한 고양이, 독가스가 담긴 유리병, 알파 입자 가속기

알파 입자 가속기는 정확히 1시간 후에 50퍼센트의 확률로 알파 입자를 방출한다. ,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첫째, 1시간 후에 알파 입자가 방축되고 독가스 유리병이 깨진다. 그러면 고양이는 죽을 것이다. 둘째, 1시간 후에 알파 입자가 방출되지 않고 독가스 유리병은 깨지지 않는다. 그러면 고양이는 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1시간 후에 천천히 뚜껑을 열어볼 예정이다.

 

문제를 뚜껑을 열어보기 바로 직전이다. 고양이는 어떤 상태일까? 근대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고양이는 죽어 있거나, 혹은 살아 있을 것이다.” 관찰자가 확인을 하든 하지 않든 고양이의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기대되는 건 양자역학자들의 대답이다. 그들은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알파 입자 때문이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알파 입자는 미시적 존재이고, 미시적 존재는 관찰자의 관측 여부에 따라서 상태가 결정된다. 관측하게 전까지는 확률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파동함수로 존재할 뿐이다. 양자역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고양이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중첩돈 상태로 존재한다.”

양자역학자들의 대답이 바보 같아 보이지만, 앞서 말했듯 오늘날의 과학은 양자역학의 손을 들어주었다. 양자역학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물리 이론이고, 양자역학의 여러 방정식에서 도출되는 예측들은 놀랍도록 정확한 값으로 들어맞는다. 오늘날 우리는 양자역학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납득이 안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멋진 말이 있다. 코넬대학의 응집물질물리학자 데이비드 머민의 말이다. “입 닥치고 그냥 계산해!”

 

차원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위치를 말하는 데 필요한 좌표의 수를 말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보자. 사과의 크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좌표가 필요하다. 가로, 세로, 높이. 사과는 X, Y, Z3개의 좌표축이면 크기나 위치를 말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사과는 3차원의 존재다.

그런데 사과의 색깔이 변해간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초록색이었는데 점차 빨간색으로 익어간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하나의 좌표가 더 필요하다. ‘시간이라는 좌표축이다. 그래서 실제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과는 4차원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공간의 3차원과 시간의 1차원으로 말이다. 이를 합해서 4차원의 시공간이라 부른다. 고양이도, 나무도, 빌딩도, 지하철도, 남산도, 지구도, 태양도, 당신도 4차원의 시공간에 존재한다.

 

오늘날 유기물의 정의는 탄소(C)’를 포함하고 있는 물질이다. 여기서 유기(organic)라는 단어는 1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단어다. 당시의 화학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들을 분류하고 있었고, 그 기준으로 생명을 사용했다. , 모든 물질을 생명과 관계없는 물질생명에 의해 만들어지는 물질로 구분한 것이다. 스웨덴의 화학자 베르셀리우스는 후자에 이름을 붙였다. 이 물질은 생명체의 기관(organ)에서 나왔으니 ’Organic’이라 명명했다.

베르셀리우스를 비롯한 당시의 화학자들은 이렇게 생명이 깃들어 있는 유기물은 생명 작용에 의해서만 생산될 뿐, 결코 인공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곧 깨어졌다. 베르셀리우스의 제자였던 뵐러가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뵐러는 무기화합물인 시안산암모늄(NH4OCN)을 가열하여 포유류의 소변 속에 들어있는 유기화합물인 요소(CH4N2O)를 인공적으로 합성했다. 이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당시의 화학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유기물을 생명의 힘과 연결하는 세계관은 무너졌다. 이후 1860년 무렵, 독일의 화학자 케쿨레가 유기물을 새롭게 정의했다. 유기물은 단지 탄소를 포함하고 있는 물질이다. 정의는 달라졌지만 ‘Organic’이라는 이름은 계속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유기물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생명과 관련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대멸종

가장 오래된 식물과 동물의 화석은 이 시기에 발견되었다. 식물의 화석은 48천만 년 전, 동물의 화석은 45천만 년 전 지층에서 확인되었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번성하던 생물들은 고생대 말기인 페름기에 이르러 급격히 멸종되었다. 이 대멸종의 사건을 페름기-트라이아스기 대멸종이라 부른다.

 

지구에 대멸종 사건은 다섯 차례가 있었는데 3번째에 속하는 이 사건이 가장 큰 규모였다. 245백만 년 전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전체 생명체의 96%가 멸종되었다. 그 원인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으나, 화산 활동, 수산화메탄의 기화, 해수면 상승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축된다.

 

고생대 캄브리아기
오르도비스기 1(43000만 년 전)
실루리아기
데본기 2(37000만 년 전)
석탄기
페름기 3(24500만 년 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4(21500만 년 전)
백악기 5(6600만 년 전)
신생대 고제3
신제3
4

 

진화론에 대한 두 가지 오해. 그것은 용불용설과 선형적 진화 이미지였다. 현대의 진화학은 이러한 오해를 국복하며 발전하고 있다. 용불용설은 자연선택설로 대체되었고, 선형적진화 이미지는 방서형 진화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우선 용불용설은 라마르크주의라고도 한다. 라마르크는 1809년에 다윈보다 앞서 진화론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진화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서 [동물 철학]. “동물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특정 형질을 발달시키고, 이렇게 획득한 형질은 자손에게 이어진다.” 이 생각은 매우 상식적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개별 개체가 획득한 형질은 다음 세대에 유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평생 오른팔로 창던지기를 해서 오른팔만 발달한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가 아이를 낳았다면 아이의 오른팔이 발달된 상태로 태어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후 50년이 지난 1859,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자연선택설을 제시함으로써 생명과 인간의 진화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자연선택설은 환경에 적합한 생물이 생존과 번식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에 점차 그의 형질을 다음 세대로 퍼뜨리게 된다는 이론이다.

 

위대한 스승은 수많은 시대와 장소에서 탄생했다. 그중에서 특히 경이로운 시기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축의 시대라 불리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축의 시대는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된 시대였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고타마 싯다르타가 등장했고,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가 활동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태어났다.

축의 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다. 그는 1949년에 출간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모든 정신적 기원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대로 축의 시대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공통적으로 위대한 스승들이 거대 사상을 설파했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바로 앞선 시기가 세계 각지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증가를 겪은 격동의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자연에서 태어나 넓은 들판을 떠돌던 인류는 이 시점부터 거대한 도시에서 태어나 문화와 상징 체계 속을 살아가게 되었다. 도시 생활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혔고, 경제, 정치,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이는 폭력과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어쩌면 축의 시대는 처음으로 문명을 일으키고 그로 인한 문제에 직면한 인류가 필연적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의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인도 사상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심적인 사상이었다. 특히 인도 사상의 뿌리가 되는 [베다]는 세계의 절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구약]이고, 다른 하나가 [베다]. 우선 [구약]은 아브라함 계열의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뿌리가 된다. 이 세 종교는 인류 절반의 세계관을 형성해왔다. 나머지 절반의 세계관은 [베다]에 기반을 둔다. [베다]<우파니샤드>와 힌두교, 불교의 뿌리가 되었고, 이들은 인도와 동양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의 한국인은 근대 이후 미국식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받아 [구약]의 세계관에 익숙한 반면, 인류 절반의 세계관인 [베다]는 낯설어한다.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정리된 문서다. 산스크리트어로 가까이 앉다라는 뜻으로, 스승과 무릎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제자들에게 비밀스럽게 전수되는 지식을 의미한다. <우파니샤드>[베다]의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 중에서 핵심이 되는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그만큼 [베다]에 비해 현대인의 감성에 더 부합하고 잘 읽히는 면이 있다. [베다]는 너무 많은 신의 이름이 등장하고 찬양을 반복하므로, 막상 읽어보면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우파니샤드>는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선명한 주제 의식을 통해 독자를 심오한 사유의 세계로 초대한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히는 고전이다.

 

브라흐만(우주 실체) ------- 2. 아트만(자아 본질)

3. 범아일여(동일함)

 

이를 종합하면 <우파니샤드>의 결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 밖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의 실체와, 네 안에 펼쳐진 자아의 본질은 궁극으로 하나다.”

 

여기서 은 브라흐만을 한역한 것이고, ‘는 아트만을 한역한 것이다. ‘일여는 오직 하나라는 뜻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다.

 

(자아)는 무엇인가

역할 및 의무, 신체, 정신까지 벗어던지면 이제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거기에 있는가? 당신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뿐이다. 당신의 1인칭 관점, 무엇인가를 보는 자, 바로 그 자리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능력, 관조하는 무엇, 다시 말해 텅 빈 의식만이 남아 있다.

 

이 의식은 특정한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능력이다. , ‘내면을 경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 능력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 영사기를 떠올려보자. 영사기 앞에는 필름이 돌아가고, 영사기의 빛이 필름의 상을 스크린에 비춘다. 그러면 우리는 스크린에 맺힌 상을 실재인 것처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의식이 작동하는 모습과 동일하다.

 

우리의 내면에는 빠르게 돌아가는 필름이 있다. 기억, 감각, 감정, , 느낌이 돌아가며 세상을 그려낸다. 이때 이러한 모든 정신적 작용을 일으키는 영사기의 빛이 의식이다. 스스로는 특정한 상을 갖지 않지만 모든 상을 일으켜 세우는 순수한 가능성의 상태, 이것이 자아의 순수한 본질적 상태다. 고대 인도인은 자기 내면의 이 투명한 의식을 아트만이라 부른 것이다.

 

서시사 <마하바라타>는 인도 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후대의 작가와 시인, 예술가는 이와 관련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인도뿐ㅁ나 아니라 인도 문화권에 포함된 동남아시사의 많은 국가에서도 <마하바라타>와 관련된 에술 작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하바라타>에서 특히 유명한 부분이 쿠르쿠세트라 전투를 다루고 있는 <바가바드 기타>. 인도인은 아직까지 이 이야기를 즐겨 읽고, 힌두교에서는 성서 중 하나로 취급한다. 어떤 내용이 인도인의 영혼을 사로잡았는지 지금부터 알아보자.

 

<바가바드 기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신의 노래혹은 거룩한 자의 노래란 뜻이고, 줄여서 <기타>라고 부른다. 이 문서는 [베다], <우파니샤드>와 함께 힌두교의 3대 경전이자 가장 중요한 철학서로 여겨진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도인의 정신적 지침서였고, 시대를 초월해 많은 이에게 사랑받고 있다. 실제로 마하트마 간디는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며 이 책을 읽었고, 올더스 헉슬리는 이 책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경전이라 극찬했다.

<바가바드 기타>는 왕자 아르주나와 그의 마부 크리슈나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터에서 형제, 친척에 맞서 싸워야 하는 도덕적 딜레마에 처함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가 다르마, 즉 의무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통해 신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바가바드 기타>의 보편적 가치가 있다. 아르주나의 고민은 당시 인도인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것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모든 인간의 고민이다. 그렇지 않던가?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의지를 상실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부모로서의 의무, 자녀로서의 의무, 학생으로서의 의무, 직장인으로서의 의무, 시민으로서의 의무 등. 우리가 그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주저할 때, 크리슈나는 우리에게 지혜롭게 말해주는 것이다. 네가 준비해왔던 바로 그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행하라. 다만 그것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럴 때 너의 마음은 평온해질 것이고, 자유로워질 것이며, 네 안의 신에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타>가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다.

 

그렇다면 신이란 무엇인가? 크리슈나는 신의 본성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그대에게 자아의 신성에 대해 설명하겠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틀을 갖지 않는다. 자아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중간이며 끝이다. 자아는 모든 존재의 탄생이고 시작이며, 끝이자 죽음이다. 자아는 영원하니 결코 태어난 적이 없고 결코 죽은 적이 없다. 자아는 모든 곳과 모든 사물 속에 존재하고 자기 속에 모든 만물이 존재한다. 자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란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떤 것도 없다.”

 

공자

공자 증자 자사- 맹자 유가(성선설)

공자 자하 순자, 한비자 법가(성악설)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느냐?”

 

공자의 가르침은 현실에서 시작해 현실에서 끝난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유교라는 단어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유가’, ‘유학이라 부른다. 유가는 삶 이전과 죽음 이후를 말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 윤리, 정치 이념이기 때문이다.

 

 

 

호칭 정리

 

일반 명사: 붓다, 부처 = 깨달은 자

부족 이름: 석가, 석가모니 = 샤카족의 성자

개인 이름: 고타마, 싯다르타 = 성과 이름

 

붓다의 가르침_사성제와 팔정도

모든 종교와 사상에는 핵심 개념이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단정적으로 말해서 불교의 근본 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단어 정도는 상식으로 외워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부분의 거대 종교가 그러하듯 불교도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방식으로 계승되었고, 다양한 교파와 교단으로 분화되었다. 이렇게 많은 분파 중에서 불교의 교파라고 부를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은 사성제와 팔정도의 진리를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여기서 사성제는 고, , , 도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고성제: 인간의 모든 고통 = 생로병사(4) + 애별리고(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거나 사별하는 고통), 원증회고(미워하고 싫어하는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고통), 구부득고(무엇인가를 얻고 싶고 또 자기 생각대로 추진하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고통), 오온성고(마지막으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다섯 가지 조건 때문에 비롯되는 고통)

 

집성제: 고의 원인을 제시한 것으로, 집착을 의미_갈애(그치지 않는 갈등, 갈망으로 욕애/유애/무유애)와 무명(무지)

 

여기서 잠시 불교의 자아에 대한 관점을 짚고 넘어가자. 결론부터 말하면, 불교에서는 고정 불변하는 나, 즉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를 무아(無我)라고 한다. 여기에 [베다]와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베다]의 세계관에서는 나의 궁극적 본질로서 아트만을 상정한다. 아트만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고정된 완벽한 실체다. 이 경우 개인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는 이러한 실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반면 불교에서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아트만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흩어지고 모이는 임시 상태일 뿐이다. 이렇게 임시로 보여 있는 상태를 붓다는 모래 무더기처럼 쌓여 있다는 의미에서 (, 쌓을 온)’이라 하는데, 특히 다섯 가지 요소로 쌓여 있다 하여 오온이라 부른다. ,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다섯 가지 요소가 임시로 쌓여 있는 무더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색, , , , 식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색은 물질 요소로, 육체를 말한다. 지방과 단백질로 된 이 몸뚱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육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지금은 순간적으로 하나의 상태로 뭉쳐 있지만, 내 몸을 세삼하게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세포가 죽고 다른 세포가 태어나며 습수하고 내보내는 물질적 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 몸속의 피는 46초마다 한 바퀴를 돌고, 피부 세포는 2주에서 4주 사이에 바뀌며, 뼈의 조직 세포는 10년이면 모두 대체된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의 신체와 지금 당신의 신체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신체는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임시적인 무더기다.

색이 육체적인 측면을 말한다면 다음의 수, , , 식은 정신적인 측면을 말한다. 수는 육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각을 말한다. 오감이 일으키는 고통, 쾌락 등의 단순 감정이 그것이다. 상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표상 작용으로, 심상, 영상 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과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행은 의지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식은 앞서의 모든 마음 작용을 일으키고 종합하는 의식 활동을 말한다. , 내가 나의 마음, 정신, 주관,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범위 혹은 밑바탕을 의미한다.

붓다는 지혜롭게 말한다. 너 자신을 세삼하게 들여다보라. 이 다섯 가지 요소가 너를 구성하는 전부다. 이 외에는 없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요소 중에서 불변하고 고정된 것은 없다. 이것들은 그저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질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나, 즉 자아가 고정된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특히 서양 철학이 18세기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철학적 담론들을 천 년을 앞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 철학의 언어에 익숙한 독자를 위해 설명하자면 실재론과 관념론의 충돌을 중관파는 중도와 공 사상으로 뛰어넘고,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유식파는 의식의 분석을 통해 해명하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관점

- 유심론 진아론: 자아가 이어짐 / 무아론: 자아가 조건에 따라 생기고 사라짐

유물론 : 그딴 거 없다.

 

우리가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춰보고 그들이 말하는 바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들 중 누군가가 진리를 말했고 다른 누군가가 거짓을 말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내가 찾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하나의 세계관의 대륙에 발을 딛고 산다. 우리가 자신의 세계관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것은 나의 세계관이 내가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대지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나의 한계이자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세계관이 답한다. 기독교인은 결국 기독교적 모범으로 자신의 삶을 수렴하고, 불교인은 불교적 모범으로 수렴하며, 과학주의자는 유물론적 결론에, 자본주의자는 경제적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가 고대인의 사상과 종교를 들춰보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수많은 낯선 대륙에 상륙하기 위해서다. 다른 세계관에 발을 디딤으로써 나의 작은 세계관의 영토를 가볍게 넘어서기 위해서다. 수많은 세계관의 대륙을 탐험하고 돌아온 사람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자신의 세계관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진아인가, 무아인가? 이제 우리는 답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나의 작은 세계관 너머를 보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유물론적 사유에 익숙한 현대인이 의식이란 뇌의 부산물이다라고 쉽게 내뱉기에는, 고대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길어올린 결과물들은 너무도 심오하다. 불변의 자아를 생각하는 사람의 삶과, 끝없이 변화하는 자아의 실체를 고민하는 사람의 삶과,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사람의 삶과, 이 모든 세계관의 의미를 이해한 이의 삶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세계관을 건너왔으니, 남은 숙제는 자기 내면 안에서 진지하게 자신의 답을 길어 올리는 것일 테다.

 

 

철학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를 그 출발로 본다.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탄생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합리적 사유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학교에서 이렇게 배웠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것은 서구의 관점일 뿐,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도와 동양에서도 위대한 스승들이 탄생했고 세계와 자아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깊이 있게 이루어졌다.

다만 서양과 동양의 차이가 있다면 동양의 철학적 사유가 일원론으로 시작된 반면, 서양의 철학적 사유는 이원론으로 시작되어 근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일원론을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동양과 서양은 각각 나름의 사유 체계를 전개해나갔고, 이를 통해 인류는 정신적 측면과 물질적 측면에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5세기 무렵의 페르시아 제국은 세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세계 인구는 1억 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가 거의 200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페르시아는 바빌론, 이집트, 인도 부근까지 영향을 미쳤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그리스의 식민지들을 하나씩 병합하고 있었다.

 

기원전 499,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 이오니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아테네는 군대를 보내 반란군을 지원했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는 반란군을 진압했고 이오니아를 도운 아테네를 정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원전 492, 페르시아군은 그리스 북부의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차례로 점령하며 그리스 원정을 시작했다. 다음은 아테네 차례였다. 다리우스 1세는 군함 300여 척으로 에게해를 건너 곧장 아테네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폭풍을 만나 본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차 원정은 실패했다.

 

기원전 490, 2차 원정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이번에는 육로로 진군했고, 아테네에서 42킬로미터 떨어진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두 배 이상 전력 차이가 났지만, 아테네군은 꾀를 내어 페르시아군을 포위했고 마침내 크게 승리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페르시아군의 계략이었다. 다리우스 1세가 계획했던 것은 전투의 승패와 무관하게 아테네군을 마라톤 평원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그 사이 페르시아의 해군은 곧장 아테네를 공격하려고 에게해를 건너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에 대해 알게 된 아테네군은 걱정이 되었다. 거의 비어있다시피 한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해군과 대면하면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해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마라톤 평원에서의 승리 소식을 아테네에 전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한 명의 병사가 선발되었다. 그의 이름은 페이디피데스였다. 그는 42km를 쉬지 않고 달려 아테네로 향했다. 마침내 아테네에 도착한 그는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이 승리했다는 소식과 페르시아군이 곧 해상으로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한 뒤 숨이 끊어졌다. 사기가 오른 아테네는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페르시아의 해군이 아테넹 도착했을 때 아테네의 전투 준비는 끝나 있었다. 이를 알게 된 페르시아의 해군은 공격을 포기하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2차 원정 역시 실패였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지만 실행에 롬기기 전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았다. 기원전 480, 그는 대군을 일으켜 3차 원정에 나섰다. 헤로도토스는 이 원정의 규모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역사상 이루어진 모든 원정을 다 합해도 이 원정에 비할 수가 없다. 크세르크세스는 아시아의 모든 민족에서 군을 징발했고, 모든 강물이 이 대군의 식수로 말라버렸다.’ 페르시아군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은 그리스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스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많은 식민도시가 페르시아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항복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맞서기로 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3백명의 친위대와 이웃 도시국가에서 모집한 수천 명의 병사만 대동하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맞섰다. 좁은 지형을 이용해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군과 효과적으로 싸웠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레오니다스의 군대는 전멸했다. 하지만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페르시아군은 사흘 동안 이곳에 붙잡혀 있어야만 했고, 그동안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함대를 모아 살라미스라는 좁은 수로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다. 대패한 페르시아군은 다시 퇴각해야만 했다.

 

이후 페르시아의 대규모 원정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럼에도 소규모 전투는 각지에서 이어졌다. 국력이 쇠퇴한 스파르타는 전쟁을 멈추고 페르시아와 협정을 맺고자 했다. 그러나 아테네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국가들이 연합한 델로스 동맹은 전쟁의 주도권을 잡아 페르시아를 계속 압박했다. 기원전 449,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의 협약이 맺어지면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을 위로하고, 이성적 올바름이라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태연하게 독배를 받았다.

 

악법도 법이다소크라테스의 말이 아님. 소크라테스에게는 국가의 법이 아니라 내면의 법이 중요했다. 다이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어떤 것’. 국가와 사회의 압력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고자 했던 것.

 

 

서양 철학이라는 거대한 학문 체계에 기여한 측면에서 본다면 소크라테스보다는 플라톤이나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을 꼽는 것이 더 합당할지 모른다. 다른 사상가들에 비하면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이것이다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특정 개념을 일관되게 설파하거나 자아와 우주에 대한 거대한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모범으로 삼는 것은 그의 삶 때문이다. 그의 삶 전체가 철학자의 삶, 다시 말해 사유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신의 철학과 삶을 일치시킨 모범이라는 면에서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기원이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플라톤

서구 사상의 역사는 플라톤이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제국이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에 대해 평가한 말은 유명하다. “서양의 2천 년의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서양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화이트헤드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거대한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데아론이다. 이데아론은 플라톤 사상의 중심 개념으로, 핵심은 의외로 친숙하다. 그것은 이데아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데아 세계란 절대적이고 완벽한 불변의 이상 세계를 말한다. 현실의 모든 것은 낡고 늙고 병들어간다. 시간이라는 필연 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반면에 플라톤은 변화하는 불완전한 현실과 구별되는 완벽한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현실 세계는 단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 혹은 모사일 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이해시키기 위해 <국가론>에서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제시한다.

 

동양 일원론(자아=세계) -> 관념론

서양 이원론(자아/세계) -> 실재론

 

서양은 플라톤 이후 이원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발전했다.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분화가 이루어졌다. 세계와 세계의 분리, 자아와 자아의 분리, 그리고 세계와 자아의 분리. 우선 세계는 완벽한 이데아 세계와 불완전한 현실 세계로 나뉘었다. 다음으로 자아는 영원 불멸의 영혼과 감각적인 나약한 육체로 분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와 자아는 각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규정되었다.

 

이 중에서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자아와 세계의 분리가 갖는 의미다. 서양의 이원론은 이 둘을 각각 독립된 실체로 파악한다. 쉽게 말해서 자아와 세계의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세계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매우 상식적이다. 그것은 세계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원론적 관점은 실재론으로 이어진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세계를 상징하는 구를 다시 꺼내어 보자. 이것을 지구로 색칠하면 되겠다. 만약 실재론자가 세계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그는 지구 위의 대상들을 잘라보고 나눠보는 분석 과정을 거칠 것이다.

 

반면에 동양의 일원론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기에 이 둘의 존재를 통합적으로 고려한다. 쉽게 말해서 자아와 세계의 존재는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나의 탄생과 함께 세계가 탄생하고, 나의 소멸과 함께 세계도 소멸한다. 그것은 세계의 실체가 자아라는 그릇에 담긴 무엇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본다는 것은 사실 나의 마음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러한 일원론적 관점은 관념론으로 이어진다. 세계를 상징하는 구는 수정구슬이다. 만약 관념론자가 세계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부터 탐색해야 한다. 마음의 구조와 형식과 특성을 파악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실재론은 인식되는 외부 세계가 이를 인식하는 주체와 무관하게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입장을 말한다. 쉽게 말해 눈앞의 물질 세계가 허상이나 가상이 아니라 진짜 세계이고, 나라는 존재의 탄생이나 소멸과는 무관하게 그대로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반면 관념론은 실재론과는 반대다. 인식되는 외부 세계가 이를 인식하는 주체와 무관하게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말한다. 쉽게 말해 눈앞의 물질 세계가 사실은 나의 내면 세계라고 이해하는 관점이다.

 

시각정보 인식과정

눈앞에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있다. 나는 이 사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본다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우선 광원이 있어야 한다. 태양이나 형광등이나 촛불이나 빛이 나오는 근원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이 광원에서 입자이자 파동인 광자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광자가 사과의 표면과 만나서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튕겨 나간다. 튕겨 나온 광자의 일부가 눈으로 들어오고 망막의 시각 세포를 자극한다. 시각 세포는 빛 에너지를 흡수한 뒤에 이를 전기적 신호로 바꾼다. 이 전기적 신호가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전달된다. 뇌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어떠한 감각기관도 없지만 신체의 각 부분에 연결된 시신경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받아들인다. 이 신호들은 종합과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뇌가 해석한 이미지가 나의 내면에 드러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느낀다. 눈앞에 잘 익은 빨간 사과가 있다.

 

칸트의 생애와 사상

이름은 들어봤고 유명하다는 것도 알겠는데 도대체 뭘 한 사람인지 말하기 어려운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1724, 프로이센의 상업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이 작은 도시는 오늘날에는 러시아에 속해 있고, 지금은 칼라닌그라드라고 불린다. 그러니 칸트의 고향이 보고 싶거나 그의 묘가 보고 싶으면 독일이 아니라 러시아로 가야한다. 지금은 러시아인으로 가득 찬 이곳을 당시의 칸트는 평생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칸트의 삶은 대단히 단조롭고 규칙적이었다. 매일의 일과는 정확히 지켜졌다. 그는 새벽 455분에 일어났고, 잠기운이 사라질 때까지 홍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이후 강의 준비를 하다가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강의를 했다. 9시부터 1245분까지는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점심은 오후 1시부터 330분까지 손님들과 대화를 하며 천천히 먹었다. 오후 330분부터는 그 유명한 산책 시간이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예외는 없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마을 사람들이 칸트가 산책하는 모습을 보며 시간을 알았을 정도였다. 그가 산책 시간을 어긴 적은 단 두 번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다른 한 번은 프랑스 혁명 소식에 대한 신문을 읽다가, 산책 후에는 가벼운 책을 읽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오후 10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었따.

 

1781, 58세의 나이에 [순수이성비판]을 출간했다.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건너뛸 수는 없다. 그것은 칸트 스스로 저서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이 기존의 철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을 지구가 아니라 태양으로 바꿈으로써 천문학의 대전환을 가져왔던 것처럼, 칸트는 물질적 대상의 위치를 외부 세계에서 내부 세계로 바꿈으로써 철학사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칸트의 사상은 서구 지성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고, 서양 철학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꿨으며, 이후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을 꽃피우게 했다.

이후 칸트는 1788년에 [실천이상비판], 1790년에 [판단력비판]을 출간하며 그의 대표적 비판서 3부를 완성했다.

 

칸트는 결혼하지 않았다. 다만 많은 이와 교류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연구에 몰두한 삶을 살았다. 1799년부터는 크게 쇠약해졌다. 81세인 1804212, 병석에 누운 그는 평생을 함께 해온 늙은 하인 람페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했다. 그리고 잔을 비운 다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다(Es ist gut)”

 

칸트의 철학을 비판철학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그의 대표작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기인한다. 이 책들은 각각 인식론, 윤리학, 미학을 다룬다. 쉽게 말하면 비판 시리즈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각각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어ᄄᅠᇂ게 알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중에서 칸트 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순수이성비판]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확실하고 참된 지식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의심할 수 없는 인식의 기반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논하는 분야를 인식론이라 하고, 이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이 합리론의 이성과 경험론의 경험이다.

 

이러한 질문에 11년간 매달린 끝에 칸트는 답에 도달하게 되었다. 칸트는 어떻게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를 종합해낼 수 있었던 걸까? 답부터 말하면 칸트가 외부 세계를 내면 세계로 옮김으로써 가능했다.

 

지금 당신 눈앞에 펼쳐진 외부 세계는 당신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당신의 인식 과정을 통해 내면에 그려진 현상 세계다. 칸트의 철학은 그래서 관념론이 된다.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 바깥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눈앞의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는 내가 눈뜬 것과 동시에 생성되어 내가 눈 감는 동시에 소멸한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을 보는 자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 불교의 일체유심조, 칸트의 관념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궁극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현대 물리학도 이제 이러한 대열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세기 양자역학의 등장은 기존까지 배제되었던 관찰자를 불러내고 있다.

 

우리는 앞서 차원에 대해 다루면서 낮은 차원에서는 서로 다른 개체로 관측되는 존재들이 더 높은 차원에서는 통합된 존재의 다른 면일 수 있음을 알아보았다. 과학의 발전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과학과 기술이 충분히 발전한 먼 미래의 후손들은 더 높은 단계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을 상식으로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우리에게 분리되어 있는 자아와 세계가, 존재와 부재가, 삶과 죽음이, 나와 타자가, 신과 인간이, 빈 것과 가득 찬 것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실체의 다른 면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서양 사상의 두 토대

흔히 서양 사상은 두 가지 토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다. 헬리니즘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헤브라이즘은 [구약] 성서의 세계관을 말한다. 헬레니즘은 서양 철학의 기원이 되었고, 헤브라이즘은 기독교이 기원이 되었다. 이것은 언뜻 대립하는 사상처럼 보인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철학과 절대자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신본주의적 종교. 하지만 대립하는 두 사상은 근원에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것은 이원론이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 철학이 세계를 이데아와 현실로 나누고 세계와 자아를 양분해온 것처럼, 기독교는 세계를 천국과 지상으로 나누고 신과 인간을 양분해왔다. 이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논리적 체계화를 이루었다.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4세기 무렵에 플라톤 철학을 기반으로 원시 신앙에 머물던 기독교를 체계화했고, 13세기 이탈리아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수용함으로써 종교와 철학의 통합을 시도했다. 유럽의 역사에서 철학과 기독교는 대립하고 갈등하며 화해할 수 없는 길로 나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근원에서는 이원론의 세계관을 공유하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헬레니즘은 시대의 이름인 동시에 문명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뜻은 그리스 문화 혹은 그리스 정신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이 융합되며 탄생한 독특한 문화와 예술의 시대를 말한다. 헬레니즘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대체로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기원전 330년부터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한 기원전 30년까지 300년의 기간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헬레니즘은 알렉산드로스부터 로마 제국 탄생 이전까지의 시대다.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장악한 로마는 결국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두고 카르타고와 대결하게 되었다. 포에니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100여년에 이르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오늘날의 튀니지 북부를 거점으로 하는 카르타고에는 명장 한니발이 있었다. 그는 놀라운 전략으로 로마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한 명의 명장만으로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일개 도시국가였던 로마는 이제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는 패권국으로 성정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 매력적인 외모와 뛰어난 언변뿐만 아니라 카리스마까지 갖춰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는 세 명의 실력자가 동맹하여 국가 권력을 독점하는 삼두정치를 제안하며 집정관이 됨으로써 로마 정치계의 중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는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의 총독이 되어 로마의 변방을 괴롭혀왔던 켈트족들을 복속시켰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업적을 <갈리아 원정기>로 기록했고, 이 책이 로마 시민에게 인기를 끌면서 폭넓은 지지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7년간의 원정 동안 로마 본토에서는 정세 변화가 있었다. 삼두정치 체제의 한 명인 크라수스가 죽자 다른 한 명인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손을 잡았다. 카이사르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해왔던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홀로 로마로 돌아갈 경우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임을 알았다. 고심 끝에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의 경계인 이탈리아 북부의 루비콘강을 건너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카이사르의 전술에 폼페이우스는 대패했고 이집트로 도망쳤다. 하지만 전세가 이미 카이사르에게 기운 것을 알았던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를 살해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왔다가 운명의 여인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권력을 다투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도와 프톨레마이오스를 몰아냈고, 그녀를 여왕의 자리에 앉혔다. 둘 사이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아들을 데리고 모든 정적이 사라진 로마로 돌아갔다.

 

카이사르는 스스로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이후 정체되어 있던 민중의 권리를 대변하는 개혁들을 빠르게 진행했다. 그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우려가 원로원과 귀족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들은 암살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겼다.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카이사르를 열네 명의 귀족들이 둘러싸고 단도로 살해한 것이다. 그중에는 카이사르와 젊은 시절부터 전장을 함께 누비던 데시무스 브루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죽어가면서도 총애하던 브루투스의 얼굴을 알아본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쳤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지지하던 민중은 분노했다. 결국 카이사르가 정치적 후계자로 에정했던 옥타비아누스가 내전 끝에 적들을 모두 처단하고 권력을 획득했다. 그리고 스스로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강제로 받아냈다.

 

기원전 27, 옥타비아누스의 즉위와 함께 고대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이미 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당시 사람들은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라고 불렀다. 로마의 영향력은 지중해 서쪽의 스페인과 영국을 아울렀고, 동쪽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 이집트, 유대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오늘날 각양각색의 인종과 언어, 지역과 무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이 스스로를 유럽인이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묶어 사유하게 된 것은 로마 제국이라는 단일한 역사에서 기원한다.

 

로마 제국 초기에는 제3대 칼리굴라와 제5대 네로 같은 황제가 나타나 폭압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다섯 명의 어진 황제, 즉 오현제의 출현으로 로마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오현제는 차례로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기원후 95년부터 180년까지 이어진 이 부유하고 평화로운 시기를 팍스 로마나라고 부른다. 당시 로마 제국의 면적은 오늘날 미국의 3분의 2에 이르렀고, 인구는 15천만 명을 넘어섰다.

 

로마가 이 거대한 제국을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형식적인 측면과 내용적인 측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으로는 그들이 도로와 항구를 발달시켰기 때문이었다. 교통로의 발달은 시간과 공간을 압축한 효과를 만들어냈고,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거대지역을 단일한 문화권, 경제권으로 묶어낼 수 있었다. 내용적인 측면으로는 로마의 다문화, 다신교 정책 때문이었다. 로마는 정복지의 고유 문화와 종교를 인정했고 그들의 자치도 허용했다. 여기에 더해 로마법과 의무를 준수할 경우에는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로마의 지배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만의 역사, 종교, 문화, 인종을 지키고자 하는 지역은 로마 제국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 지역도 그중 하나였다.

 

로마 제국 변방의 유대 지역

[구약] 성서에 따르면 기원전 1030, 사울이 이 지역을 통일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두 번째 왕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치세를 이어갔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도시를 정비하고 외교를 통해 국내외를 안정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자 나라는 둘로 나뉘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열두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거느리고 남유다의 왕이 되었다. 남유다 왕국은 유대인의 뿌리가 되었다. 솔로몬의 신하였으나 후에 반란을 일으킨 여로보암은 나머지 열 개 지파를 규합하여 북이스라엘을 건국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에 의해 먼저 멸망했다. 이 과정에서 북이스라엘인은 아시리아인과 혼합되었고 후에 사마리아인으로 불렸다. 유대인은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사마리아인을 천대했다.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 2세가 침공을 감행하자 유다 왕국은 멸망했다.

 

왕국이 사라지고 유대인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기원전 597년부터 기원전 539년까지 4만여 명이 노예가 되거나 지구라트 건설에 동원되었다. 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이 시기에 구세주가 나타나서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이사야의 메시아 사상이 유대인에게 깊게 자리 잡혀갔다.

 

바빌론 유수는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정복될 때까지 60년 동안 지속됐다.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는 유대 지역을 점령하고 유대인이 이곳에 돌아와 자신들의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유대인의 삶은 안정될 수 없었다. 전쟁과 혼란은 계속됐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138억 년에 이르는 시간을 여행했다. 인간이 가진 추상화의 능력은 138억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도 서너 음절의 단어로 표현해버리지만, 이 숫자가 담고 있는 실제 의미는 가늠할 수 없다. 만약 우주를 초월한 관찰자가 존재하고 그가 우주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면 그의 마음은 어떨까? 우리는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라고 해도 부족한 이 짦은 생의 한 순간에 지구 위의 작은 공간에 앉아 우주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는 이야기를 방금 읽어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 우주를 초월한 존재가 느낀 마음이 혹시 지금 당신의 마음과 동일한 것이 아닐까?

우주의 창조와 소멸을 말하고 물질의 탄생과 생명의 의미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논하는 자. 이렇게 놀라운 존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유일한 자이고,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최후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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