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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도시_스티븐 존슨

독서_필사발췌독/인문사회과학

by 토르본크러셔 2022. 1. 1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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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도시_대규모 전염병의 도전과 도시 문명의 미래_스티븐 존슨]

 

한 줄 요약: 존 스노 박사가 파헤치는 1854년 런던 콜레라 유행의 전말

 

존 스노라는 평범한 이름의 의사가 있다. 스노는 19세기 빅토리아 시기 영국의 다른 의료계 명망가와 달리 요크셔 노동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런던 대학에서 의학사 및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외과의사로 개업했지만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마취 실력으로 더욱 유명했다. 1853년 봄에는 여덟째 아이를 출산한 빅토리아 여왕의 클로로포름 마취를 담당해 최고의 명의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스노는 마취와 관련된 업적만으로도 의학의 역사에 당당히 이름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의 지적 탐색 능력이 최고로 발휘되어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야는 역학과 공중보건학이다. 1840년대 말 영국은 콜레라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는 콜레라의 원인에 대해 각종 이론이 난무했다. 콜레라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지는 과정에 감기처럼 매개체가 있을 것이라는 감염론과 비위생적인 공간에 가득 찬 독기 때문이라는 독기론이 맞섰다. 에드윈 채드윅이나 윌리엄 파와 같은 공중보건 전문가조차 미신과도 같은 독기론을 지지했다.

스노는 1848년 콜레라 자료에서 뚜렷한 특징을 발견하고 정체 모를 매개체를 통해 옮는다고 생각했다. 1854년 런던에 콜레라가 재유행하자 감염론을 입증하기 위해 스노는 콜레라가 발생한 빈민촌을 꼼꼼히 조사해 증거를 모았고 런던에 식수를 제공하는 회사의 자료를 모았다. 두 자료를 취합해 감염지도를 작성한 후 스노는 특정 상수회사의 상수도가 오염돼 콜레라 발생이 높다는 가설을 세웠다. 헨리 화이트헤드 목사의 도움으로 교구 이사회를 설득해 콜레라가 유행한 브로드 가의 펌프를 제거한 순간은 인간 대 콜레라균의 싸움에서 역사적 반환점이었다. 스티븐 존슨의 [감연 도시]1854828일부터 98일까지 있었던 콜레라 유행의 확산과 억제를 생생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준다.

 

쓰레기 재활용은 모든 복잡계에 공통된 특징인 듯하다. 사람이 조성한 도시의 생태계든 세포 내부의 미시적 경제계든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뼈부터가 수십억 년 전에 자연이 만들어낸 재활용 기법의 결과다. 모든 진핵생물은 칼슘을 부산물로 내는데, 대략 캄브리아기부터 남는 칼슘을 효과적으로 쓰는 법이 생겨났다. 껍데기, 이빨, 골격 등을 만드는 데 쓰게 된 것이다. 인간이 직립 보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진화를 통해 쓰레기 재활용 솜씨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산호초도 이에 비견할 만한 쓰레기 관리 재주를 지녔다. 산호는 말류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녹조류와 공생한다. 녹죠류는 광합성을 통해 태양빛을 확보하여 이산화탄소를 유기 탄소로 전환시키는데, 그 과정에서 부산물로 산소를 낸다. 이 산소를 산호초가 자신의 신진대사에 사용한다. 호기성 생물인 우리는 산소를 쓰레기로 여기지 않지만 녹조류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쓰레기이다. 신진대사 과정에서 방출되는 쓸모없는 물질이다. 한편 산호가 쓰레기로 내는 이산화탄소, 질산염, 인산염은 녹조류의 성장을 돕는다. 산호가 영양분이 부족한 열대 바다에서 다양하고 조밀한 생명군을 지탱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치밀한 쓰레기 재활용 사슬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산호초는 바다의 도시이다.

 

박테리아가 분해해주지 않았다면 지구는 오래전에 쓰레기와 사체로 뒤덮였을 것이고, 생명을 보호하는 껍데기인 대기는 금성의 표면만큼 산성을 띠어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악랄한 바이러스가 등장해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를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버린다 해도 생명의 역사는 손실을 감내한 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하룻밤 새에 모든 박테리아가 사라진다면, 모든 지구 생명이 몇 년 안에 완벽히 궤멸될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을 상세히 묘사할 때 악취에 대한 언급은 빠지는 법이 없었다. 산업 연료를 태우는 악취도 있었지만 더 역겨운 냄새, 후에 공중보건 기반시설을 낳게 한 최고르 끔찍한 냄새는 박테리아들이 쉴 새 없이 유기물을 분해하며 피우는 악취였다.

하수도에서 솟는 죽음 메탄가스도 미생물 수백만 마리가 성실하게 사람 똥을 바이오매스로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쓰레기 기체 중 하나였다.

 

런던 청소부들의 지하 시장에도 나름의 위계와 권력이 있었는데, 그 정점에는 분뇨 수거인이 있었다. 분뇨 수거인은 개펄 수색꾼이나 강물 수색꾼보다 훨씬 비위 상하는 일을 하는데도 주류 경제의 가장자리에 포섭되어 독립적으로 일하는 제법 어엿한 도급자였다. .. 인간의 배설물을 수거하는 일은 칭찬받을 만한 직업이었따. 중세에는 갈퀴꾼또는 공 페르모(, 실어나르는 사람)’라고 불렸으며, 쓰레기 재활용 체계에 꼭 필요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런던이 진정한 수도로 자리 잡는 데 한몫을 했다. 이들은 분뇨를 도시의 벽 너머 농부들에게 팔았다. (후에는 사업가들이 인분에서 질소를 추출하는 기술을 발견하여 화약 제조 재료로도 쓰게 된다.) 갈퀴꾼과 그 후예의 수입은 짭짤한 편이었으나 작업 환경을 위태로웠다. 1326년에는, 갈퀴꾼으로 일하던 리처드라는 노동자가 불운하게도 똥구덩이에 빠져 익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 무렵의 분뇨 수거인들은 그들만의 정교한 작업 지침이 있었다. 반드시 자정에서 새벽 5시 사이에 일하는 야간 근무였으며, ‘밧줄 담당한 명, ‘구멍 담당한 명, ‘통 담당두 명으로 이루어진 41조였다. “런던 일꾼들은 분뇨 구덩이 넷 중 셋 비율로 진 한 병씩을 마십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은 수정궁, 트라팔가 광장, 웨스트민스터 팰리스 증축 건물 등 엽서 사진으로 손색없는 명소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하지만 놀랍기로 치면 그에 뒤지지 않는 전혀 다른 광경들도 있었다. 오수가 넘실대는 인공 연못, 집채만 한 똥 무더기.

 

배설물이 도시에 슬금슬금 차오른 건 높은 제거 비용 탓만은 아니었다. 수세식 변소의 인기가 급상승한 것도 위기를 가속했다. 분뇨를 물로 씻어내는 기기를 처음 발명한 것은 존 해링턴 경(1561~1612)이었다. 16세기 후반, 해링턴 경은 대모인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실제로 구동하는 수세식 변소를 리치몬드 궁에 설치했다.

 

1851년의 대박람회 중에는 조지 제닝스라는 업자가 하이드 파크에 공용 수세식 변소를 설치하여 또 한 번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 변소를 이용한 관람객이 827,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관람객들은 박람회가 선보인 세계 문화 및 근대 공학의 전시물에 감탄을 금치 못했겠지만, 아마 그들이 겪은 가장 경이로운 체험은 난생처음 수세식 변소에 앉아본 일이었을 것이다. 수세식 변소는 삶의 질 면에서는 대단한 혁신이었지만 도시의 하수 문제에는 재앙에 가까웠다. 제대로 된 하수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터라, 변소가 내린 물은 기존의 분뇨 구덩이로 쓸려가 구덩이가 넘칠 가능성을 높일 뿐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런던의 쓰레기 위기를 부추긴 단 하나의 요인을 꼽으라면 인구였다. 쓰레기를 양산하는 사람의 수가 50년만에 거의 세 배로 늘었다. 1851년의 인구조사를 보면 런던은 인구 240만 명으로서 지구상 가장 큰 도시였다. 19세기 초입에는 100만 명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현대의 도시공학적 기반시설을 갖추고도 그러한 폭발적인 성장을 제대로 건사하기는 힘들다. 하물며 아무런 하부구조 없이 233제곱킬로미터의 땅에 갑자기 200만 명이 몰려 살게 되었으니, 그저 한 번쯤 겪고 넘어가는 재앙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모클레스의 칼: 기원전 4세기, 시칠리아의 디오니소스가 신하 다모클레스에게 군주의 처지를 설명할 양으로 실 한 가닥에 매달린 칼 아래 앉히고 연회를 베풀어준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협을 뜻한다.

 

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액체 속에는 소장 상피 세포 조각들이 들어 있다(‘쌀물대변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흰 알갱이가 이것이다.) 콜레라균도 엄청나게 많이 들어 있다. 콜레라에 걸리면 최대 20리터까지 수분을 배출하는데, 장액 1밀리리터마다 콜레라균이 약 1억 개씩 들어 있다.

한마디로, 어쩌다 비브리오 콜레라균 100만 마리를 섭취한 사람은 사나흘 만에 1조 마리의 박테리아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박테리아는 인체를 공장 삼아 제 종족을 100만 배 불린다. 공장이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식민지로 삼을 다른 공장이 틀림없이 곁에 있을 테니까.

 

콜레라균 한 마리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 위장의 산성도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00만 마리에서 1억 마리 정도가 있어야 질병에 감염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테리아가 활동하는 소우주의 규모와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우연히 세균 1억 마리를 삼킬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박테리아가 맨눈에 감지될 정도로 많으려면 물 1밀리리터에 1,000만 마리쯤 있어야 한다.(1밀리리터는 물 한 컵의 0.4퍼센트, 4,000분의 1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 한 컵에 콜레라균 2억 마리가 담겨 있다 해도 우리는 뿌연 줄로 모르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자 린 마굴리스(1938~2100)는 이렇게 말했다. “동물이 뭍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의 환경을 자기 몸속에 간직하는 기교를 부렸기 때문이다. 수생 생태계를 완벽하게 벗어난 동물은 없다. ... 아무리 높고 건조한 산꼭대기에서도 아무리 현대적이고 외딴 은신처에서도 우리가 땀이나 눈물로 흘리는 액체는 사실상 바닷물이다.”

 

얄궂게도, 스노가 물에서 콜레라의 자취를 찾으려다 실패한 날로부터 며칠 전, 이탈리아 피렌체 대학의 한 과학자가 콜레라 사망자의 장점막에서 콤마 모양으로 생긴 작은 생명체를 발견했다. 최초로 콜레라균을 목격한 것이었다. 당사자였던 필리포 파치니는 관찰한 내용은 <콜레라에 관한 현미경 관찰 및 병리학적 추론>이라는 논문에 담아 그해에 발표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질병의 세균설이 주류 과학계에 진입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모종의 공기 오염을 통해 콜레라가 전달된다는 독기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때였다. 파치니의 논문은 철저히 무시당했고, 콜레라균은 이후 30년간 다시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상으로 물러나 숨었다. 존 스노는 무덤에 누울 때까지도 자신이 수년간 찾아 헤맨 콜레라 인자가 자기 생애에 이미 확인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황화수소(배설물에 저장된 에너지를 재활용하는 박테리아들은 황화수소를 방출한다.)나 카다베린처럼 존재감이 분명한 분자는 위협을 가리키는 단서일 뿐 그 자체가 위협은 아니다. 썩은 바나나나 양고기에 코를 박으면 틀림없이 구역질이 나겠지만 아무리 끔찍해도 그 때문에 질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물론 순수한 메탄가스나 황화수소를 흡입하면 사망할 수도 있따. 하지만 박테리아가 분해 활동으로 주변을 채울 만큼 많은 기체가 절대 나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메탄, 푸트레신, 카다베린 등은 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이다. 진짜 불은 미생물들이다.

 

보건국은 콜레라가 공기를 통해 전달된다고 확언했었다. 그러다 확신을 반박하는 증거가 발견되자, 즉 콜레라가 물을 통해 전달된다는 분명한 사례가 제시되자 반대 증거를 오히려 원래의 확신에 대한 추가 증명에 활용했다. 공기의 독성이 너무 강해 물까지 감염시켰으리라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잘못된 추론을 확증 편향이라고 하는데, 새로운 정보를 기존 선입견에 끼워 맞추는 경향이다.

 

브로드 가 우물을 다시 파헤치는 일은 요크라는 지역 검사관이 맡았다. 이번에는 브로드 가 40번지 지하의 오물 구덩이도 함께 점검하기로 했다. 검사 결과, 40번지 건물에서 하수관으로 이어지는 배수관은 이곳저것에 설게상 결함이 있었다. 집 앞 오물 구덩이는 하수를 잠시 모았다 흘려보낼 웅덩이로 고안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하수의 정상적인 흐름을 막아버리는 댐처럼 기능했다. 화이트헤드는 그곳에서 물로도 씻겨 내려가지 않는 혐오스러운 것들, 자세히 말하기도 꺼려 지는 것들을 요크가 확인했다고 적었다. 오물 구덩이 벽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어찌나 부식이 심한지 힘을 주는 둥 마는 둥 해도 쉽게 부스러져 내렸다.” 오물 구덩이 바깥 벽돌담에서 고작 80센티미터 거리에 브로드 가 우물이 있었다. 발굴 당시 우물의 수면은 오물 구덩이보다 82센티미터 정도 아래였다. 오물 구덩이와 우물 사이 공간은 어땠을까? 요크는 인분을 가득 머금은 질척한 흙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답은 단순하게도 건물 구조 문제였다. 건물 정면 오물 구덩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건 루이스 가족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층에 사는 다른 주민들은 창문 밖으로 쓰레기를 던져 집 뒤로 난 꾀죄죄한 마당에 버렸다. 따라서 브로드 가 40번지 뒤편 컴컴한 땅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콜레라균이 서식하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소장에서 나온 녀석들이었따. 그러나 불결한 뒷마당에서 솟은 물을 마시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감염 사슬은 그곳에서 막혔다. 소호 전역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콜레라균이 불어나고 있었지만 박테리아와 브로드 가 우물 사이의 고리는 루이스네 아기가 죽은 다음에 끊어진 것이다. 루이스 부인이 집 앞 오물 구덩이에 내다 버릴 게 없어지면서 말이다.

 

사라 루이스는 딸의 마지막 나날을 돌보며 했던 행동이 런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전염병을 야기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까?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무심코 일으킨 사건 통에 남편까지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토머스 루이스는 98일 금요일에 자리에 드러누웠다. 펌프 손잡이가 제거되고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랜 투병으로 무려 열하루를 견뎠지만, 젊은 경관은 황폐해진 동네에 아이마저 잃은 부인을 홀로 남긴 채 99일에 세상을 떴다. 전염병은 브로드 가 40번지에서 시작되고, 끝이 났다.

토머스 루이스가 앓은 시기를 보면 한 가지 으스한 대체 역사를 상상할 수 있다. 브로드 가 전염병이 가라앉은 이유 중 하나는 우물과 주민들의 소장을 잇는 유일한 가시적 경로가 브로드 가 40번지 오물 구덩이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라 루이스는 남편이 앓아눕자 다시금 양동이에 담긴 찌꺼기 물을 오물 구덩이에 내다버리기 시작했다. 스노가 그 시점에 이사회를 설득해 손잡이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신선한 콜레라균을 재충전한 우물물 때문에 다시 한 번 온 동네에 질병이 만연했을지도 모른다. 스노의 개입은 질병 확산을 막는데 그치지 않고 재발까지 방지한 셈이다.

 

롱테일경제학이라는 게 있다. 온라인 사업은 큰 히트작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기보다 변덕스런 고객들이 이루는 롱테일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경제학 모델에 따르면 하나의 앨범을 100만 장 파는 것이 늘 나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1,000가지 앨범을 100장씩 파는 것도 그만큼 수지가 맞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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